진태원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폭력은 모두 악인가. 모든 폭력은 비난받아야 하는가. 폭력의 20세기를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도처에 만연한 폭력을 목격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다양한 폭력담론을 비교·분석해 봄으로써 폭력의 본질과 영향, 그 메커니즘을 고찰해보고 그것의 정당성과 한계, 대안에 대해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폭력에 대한 성찰  ② 폭력과 정치 ③ 법과 폭력 ④ 혁명과 폭력 ⑤ 폭력과 비폭력

 

   폭력에 관해 단도직입적으로 가치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우리는 보통 폭력은 나쁜 것, 어떻게든 막아야 하고 제거해야 하는 것,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폭력은 과연 나쁜 것인가?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피하거나 억제되어야 하는 것인가? 당장 몇 가지 반례가 떠오른다. 가령 군사독재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폭력은 어떤가?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는 소수민족의 투쟁은 어떤가? 또한 부당한 폭력 때문에 심각한 위험에 빠졌을 때 행사되는 폭력, 이른바 정당방위는 어떤가?
이 사례들은 특별한 종교적 교리와 결부되지 않는 한, 순수한 비폭력을 옹호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순수한 비폭력이 최악의 폭력을 낳을 수도 있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해방의 정치’의 본질주의적 폭력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이 쉽게 정당화되거나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연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또 정당화된다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고전적인 해방의 정치(여기에는 조르주 소렐 등의 무정부주의도 포함된다)는 폭력의 활용 가능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해방의 정치에서 폭력론은 본질주의적 폭력론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폭력은 지배계급이나 억압적인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며, 독자적인 기준에 따라 판별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식민주의·성 등과 같은 다른 기준에 종속된다. 곧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폭력은 계급지배의 틀에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식민지 해방운동의 관점에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배라는 틀 안에서만, 여성해방의 관점에서는 남성지배라는 틀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배와 억압에 맞선 저항의 폭력 또는 대항폭력은 본질적으로 정당한 것이며,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적인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의 문제점은 폭력적인 수단의 위험성에 둔감하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폭력의 애매성을 보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다. 곧 고전적인 해방론에는 폭력이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잠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데리다와 폭력의 애매성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7.15 ~ 2004.10.8)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7.15 ~ 2004.10.8)

   마르크스주의가 간과했던 폭력의 애매성을 베버는 정치의 핵심 문제로 제기한 바 있다. 베버는 정치란 “모든 강제력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직업으로서의 정치>)이라고 주장했으며, 정치의 비극이란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반면 혁명은 공포정치로 전도되기 쉽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베버에게 남은 길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베버가 남겨준 불편한 진실과 대결하는 일은 후배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준초월적 규범 이론에서 베버의 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면, 데리다는 폭력의 아포리아를 좀 더 심화하는 길을 택했다.
   해체론의 창시자가 보기에 폭력은 인간의 삶에 원초적인 것이어서 억압적인 지배권력만이 아니라 고결한 해방운동의 주체들도, 또한 비폭력의 옹호자들까지도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폭력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더 나아가 로고스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이다. 
데리다가 일부 철학자들에게 불신 받고 비난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데리다는 로고스를 원초적 폭력에서 파생된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합리성의 근거, 곧 서양철학의 기초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체는 허무주의와 상대주의라는 비난이 제기된다. 로고스가 파생적인 것이라면, 로고스의 기원은 폭력ㆍ광기ㆍ정념ㆍ신비 등과 같은 이성의 타자일 수밖에 없고, 이는 정당성(legitimacy)이나 정당화(justification)의 문제를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해체는 로고스 중심주의보다 더 철학적이다. 왜냐하면 해체는 로고스중심주의 철학이 독단적으로 전제하는 기원ㆍ법ㆍ동일성 자체의 근거에 관한 질문을 비판적으로 또는 유사 초월론적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기원ㆍ법ㆍ동일성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는 로고스중심주의 철학이야말로 원초적 폭력(archi-violence)을 은폐하는 이차적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폭력적이다.
   그렇다면 보통 생각하듯이 법과 폭력을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법과 폭력 모두 동일한 원초적 폭력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중의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자신을 일체의 폭력성에서 면제시킴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법의 관심(interest)이 사실은 어떤 폭력의 이해관계(interest)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법에 내재한 위선과 불의를 폭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로운 법, 새로운 정의로 제시하려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의 주장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 역시 기존의 법과 마찬가지로 폭력과 대항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의란 불가능한가? 법의 역사, 정의의 역사란 완전히 정당하지도 않고 완전히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과 대항폭력, 권력과 대항권력 사이의 상대주의적인 갈등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발리바르와 반폭력의 정치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1942 )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1942 )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불량배들> 같은 후기 저작에서 이 질문에 대해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대담한 범주를 중심으로 독창적이고 세심한 답변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여기서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제안하는 반폭력의 정치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발리바르는 일련의 저작에서 고전적인 폭력론의 범주인 폭력과 대항폭력, 비폭력과 구별되는 ‘반폭력’(anti-violence)이라는 개념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반폭력은 자칫 ‘비폭력’(non-violence)과 혼동되기 쉬운 개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반폭력은 비폭력과 비슷한 것이 아닐뿐더러 그보다 훨씬 넓고 근원적인 쟁점을 제기하는 개념이다.
발리바르는 폭력의 애매성을 긍정하는 점에서도, “폭력 내부에서 폭력을 반대하는 것”의 필연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도 데리다와 같은 입장이다. 또한 두 사람은 ‘극단적 폭력’ 내지 ‘잔혹한 폭력’이 폭력의 문제를 특별히 중대한 정치적 쟁점으로 만든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서로 일치한다. 그가 데리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이러한 쟁점들을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제도에 대한 분석과 연결하여, 폭력에 맞서는 정치적 실천의 조건 및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은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잠식할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실존의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인간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폭력은 인종청소처럼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징적인 권력에 기반을 둔 폭력이나 자연재해, 일회용 인간들 같은 현상으로 오늘날 도처에서 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장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 힘겹게 그저 몸뚱이로 견뎌내는 사람들, 그저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우리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 폭력은 이처럼 사람들 사이의 끈을 파괴하는 폭력, 그리하여 개인들이 지닌 인간적 차원을 해체시키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을 정치의 근본 쟁점으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 지배계급의 폭력에 맞서 민중들은 단결해야 한다는 공문구의 반복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정치는 오늘날 인민 대중의 정치로서 좌파 정치의 사활이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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