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0.9 금 13:00
기획문화
지속가능한 딴따라
김작가 / 대중음악평론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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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호]
승인 2009.03.06  12: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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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문화’라 일컬어지는 대안문화는 물신숭배를 조장하는 문화산업과 그로 인한 인간성 파괴에 반기를 들고 등장했다. 이번 기획에서는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대안문화’의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우리는 느리게 걷자

아무도 몰랐다. 2004년 <관악포크청년협의회>라는 컴필레이션이 등장했을 때 수많은 자가제작 앨범의 하나인 줄 알았다. ‘붕가붕가레코드’라는 레이블명을 보고 또 하나의 키치인 줄 알았다. 그땐 그랬다. 이듬해 나왔던 ‘청년실업’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에 다니는 친구들이 하는 키치적이고 위악적인 밴드로 끝나는 줄 알았다. “밤은 깊어 가는데 기상시간은 정해져있다”같은 가사는 위트가 넘쳤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붕가붕가 레코드는 ‘루비 살롱’과 더불어 한국 인디 씬의 가장 ‘핫’한 레이블이 됐다.
그것은 융기였다. 두 번의 치솟음이 있었다. 2007년 말, 조용히 등장한 ‘브로콜리 너마저’의 EP <앵콜요청금지>에 담긴 동명의 노래가 조용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제목과 더불어 소박하고 단아한, 그러나 범상치 않은 멜로디. 그리고 은유적이면서도 일상적인 가사는 이 노래를 매달리는 전 애인에게 바치는 노래처럼 보이게 했다. 후일 이 노래를 만든 윤덕원(베이스)이 사랑노래가 아니라고 부인할 때까지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앨범은 그들이 다른 레이블에서 정규 데뷔 앨범을 발매한 지난해 말까지도 계속 전문 레코드 숍의 판매 수위권에 올랐다. 그러나 그건 전조에 불과했다. 2008년 5월 뚝 떨어진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 싱글의 입소문은 더욱 거셌다. 처음에는 홍대 앞에서 야금야금 화제를 모으더니 가을의 록 페스티벌과 EBS <스페이스 공감> 출연 동영상이 인터넷에 몰아쳤다. ‘홍대 앞의 빅뱅’, ‘인디의 서태지’를 넘어 급기야는 ‘가요계의 버락 오바마’라는 별명이 장기하에게 붙었다. 결국, 장기하는 2월 현재 빅뱅의 태양을 누르고 한국 대중음악상의 ‘네티즌이 선정한 올해의 음악인’ 투표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건 기적이다. 정말 아무도 몰랐다. 붕가붕가레코드 자신도 그럴 줄 몰랐다.
소박한 시작이었다. 서울대 재학생들끼리 모인 일종의 ‘집단’으로 출발했다.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라는 모토 하에 모든 걸 스스로 해결했다. 레코딩은 친하게 지내는 밴드 작업실에서 해결했다. 프레스는 강의실에 컴퓨터를 가져다놓고 직접 구웠다. 종이박스에 스티커를 붙여서 포장을 해결했다. 붕가붕가레코드의 특징인 가내 수공업 싱글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1만 장을 훌쩍 넘긴 장기하의 싱글 역시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장기하뿐만 아니라 ‘치즈 스테레오’나 ‘술탄 오브 더 디스코’ 등 기존 소속 밴드의 인기도 올라갔다. ‘아마도 이자람 밴드’와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이 새로운 식구로 합류했다. 이미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식 데뷔 앨범 <별일 없이 산다>는 가내 수공업을 벗어나 ‘공장제 대량 생산’으로 제작되었다.

 

‘딴따라질’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붕가붕가레코드의 시스템은 인디 레이블이 어떻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메이저의 시스템은 융단폭격이다. 데뷔 전, 연습생 시절부터 팬클럽이 결성되고 데뷔 직후에는 온갖 예능 프로를 총동원해서 물량으로 승부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붕가붕가는 완벽한 반대였다. 그들의 목표는 전업 뮤지션도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음악을 계속 하는 거였다. 불투명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신기루를 찾는 대신, 산업의 외연을 벗긴 음악 그 자체만 본 것이었다. 저예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차라리 무예산에 가까운 제작시스템은 누구에게도 큰 경제적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이렇다 할 홍보도 한 적이 없다. 앨범에 딸린 간략한 보도자료 한 장이 전부. 나머지는 입소문과 공연에 모든 걸 맡겼다. 인건비도, 경상비도 오직 동인집단에 가까운 청년들의 시간과 땀으로 해결했다. 미디어를 통한 하향식 인기몰이가 아닌, 입소문에 의한 팬 커뮤니티가 음악을 자발적으로 알리는 방식을 택했다. 양질의 사운드 대신 노래 그 자체에 집중했기에 붕가붕가레코드의 많은 음반들이 크든 작든 입소문을 탔다. 장기하는 그 대표적인 사례를 넘어, 입소문으로 스타덤에 오른 한국 대중음악의 이변일 테고, 그야말로 ‘노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이다.
붕가붕가레코드의 이런 활동방식은 한국 대중문화산업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크게 베팅해서 크게 먹는다”는 식의 블록버스터 논리는 이미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탐욕과 오만이 결국 파생상품에서 시작한 금융위기를 낳았듯, 엔터테인먼트산업은 돈놀이가 콘텐츠를 압도한지 오래였다. 결국 거품이 터졌고 위기설이 덮쳤다. 그러나 붕가붕가는 설령 ‘장기하와 얼굴들’의 앨범이 실패하더라도 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애당초 이들의 목표는 도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앨범은 싱글과 마찬가지로 홈 레코딩으로 제작됐다. 장기하는 여전히 “전업 뮤지션하다가 안되면 다른 일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만하면 스타덤이건만, 여전히 그들의 주활동 무대는 홍대 앞이다. 레이블의 대표인 고건혁은 이리도 일이 커졌음에도 본업을 놓지 않고 있다. 대신 상근직원 한 명이 들어와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 지를 법 하건만, 크게 지를 법하건만, 여전히 느린 발걸음이다. 자본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대기업의 논리도, 작게 시작해서 터지면 크게 지르는 벤처의 논리도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붕가붕가는 일종의 코뮌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약간의 인력과 상당한 스케줄, 그리고 이를 능가하는 관심이 있을 뿐이다. 70년대의 청년문화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으로 이어지는 모든 하위문화는 늘 제도권 밖에서 나온다. 스타덤에 대한 허영보다 창작에 대한 욕망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대중과 시스템을 좇기보다 그들이 따라오게 했기 때문이다. 청년문화가 소멸했다는 개탄도 식상한 지금, 친구들끼리 재미삼아 시작한 레이블이 한국 청년문화의 계보를 잇고 있다.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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