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라진 시대, 휴머니즘의 복권을 요청하며

일반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정도로만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의 후기 면모를 살펴보고 의아해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도 ‘위대한 예술’에 끌린다. 왜 그런지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을 남기며 일견 ‘정치’와 거리를 두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 연구자 바트 무어 길버트는 사이드의 이런 변화가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정치와 예술을 독립된 별개의 항으로 구분하려 했던 불가능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치와 예술은 그리 쉽게 갈라설 수 있는 개별항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은 항상 이미 윤리로서의 정치를 말해왔다. 최근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로 주목받고 있는 신형철은 “문제는 정치(의 윤리)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윤리(의 정치)를 위한 질문이다”라고 말했다. 신형철의 주장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에 대한 논리적 반증으로 쓰인 것이다. 고진은 오늘날 문학이 비명횡사한 근거를 정치의 소멸 혹은 부재에서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고진은 바트 무어 길버트가 범했던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미시층위에서 문학과 예술이 윤리(의 정치)와 무관했던 적은 결코 없다. “정치를 보족하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를 창안하는 윤리를 말해야”했던 것이다.
신형철의 이 정당한 ‘윤리(의 정치)’를 나는 휴머니즘의 요청으로 이해했다.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가 구조주의자답게 ‘반-인본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이래 역사의 뒤안길로 초라하게 밀려나버린 저 휴머니즘 말이다. “어떤 것이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공격하는 것이 그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해체해버리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저항의 인문학>)는 사이드의 의미심장한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오늘날 냉소와 무기력이 정치의 또 다른 이름이 돼버린 지 오래다. 이는 ‘정치(의 윤리)’만을 강요하면서 ‘인간’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내게 신형철의 ‘윤리의 정치’ 테제와 사이드의 휴머니즘 테제가 작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때문에 문학이, 인간이 사라진 이 시대에 나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이게도 휴머니즘의 복권을 꿈꾼다. 나는 그것이 ‘문학’이라고 흔들림없이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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