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우 /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석사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방한해 서울대(‘민주주의와 인권’, ‘테러가 뜻하는 것’), 홍익대(‘감성적/미학적 전복’), 중앙대(‘동시대 세계의 정치적 주체화 형태들’)에서 서로 다른 네 개의 주제로 강연했다. 이번 연속 강연은 청중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미학/감성학’(esth럗ique) 개념을 다뤘던 홍익대 강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이는 이 개념의 새로움과 논쟁적인 성격에 한국 청중이 보이는 특별한 관심을 방증하는 듯했다.


랑시에르는 서울대 강연에서 ‘불화’에 기초한 민주주의 개념과 ‘치안/정치’의 구분에 의거해 불일치 과정으로서의 인권에 관해 논했고, 홍익대 강연에서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자신의 핵심 개념을 통해 미학적/감성적 체제 안에서 감각적인 것들의 분배가 어떻게 정치적 문제와 연관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중앙대 강연에서는 탈정체성 개념에 중점을 두고 경계에 있는 이들이 지닌 정치적 행위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체화/탈주체화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밝히기도 했다.

                           ‘석학’을 바라보는 익숙하지만 잘못된 시선들

  하지만 언론에서 랑시에르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대부분 한국이나 세계의 정세와 관련해 랑시에르로부터 어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언급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언론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중이 랑시에르라는 철학자와 그의 이론에 기대하는 부분과 맞물려 있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실제로 서울대 강연에서는 최근 한국의 여러 정치상황과 관련된 질문이 많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랑시에르의 방한강연이 갖는 의미가 단순히 정치와 철학에 대해 사유하는 한 명의 ‘석학’에게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이나 정세 진단 등을 듣는 ‘제한된’ 경험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사유하고 우리의 문제에 대해 진단을 내리는 일은 결국 언제나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이 ‘우리’는 물론 단순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을 수 있는 민족주의적인 ‘우리’가 결코 아니다). 한국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랑시에르에게 의견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세부적인 상황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는 랑시에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자신의 이론에 입각한 다분히 일반론적인 언급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초점을 둬야 할 것은 한국의 여러 정치적/경제적 상황에 대해 랑시에르의 입을 빌려 진단을 내리거나 분석을 행하는 것보다는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논의를 최대한 잘 전달하거나 전달받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랑시에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 역시 한국 정세에 대해 자신이 직접적으로 말한 ‘일반론’이 통용되는 일보다는, 자신의 논의를 통해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정치성을 조직해내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물며 랑시에르의 입을 빌려 ‘우리’의 사실을 왜곡하거나 곡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한 언론의 기사 제목에서 이런 부정직하며 몰염치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 신문은 랑시에르와의 인터뷰 기사에 “욕망 제어 못하는 민주주의, 사회질서 해치는 정치과잉”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주지하다시피 랑시에르가 말하는 ‘과잉’은 정치적 주체화의 한 조건인데, 이런 기사 제목은 불화와 불일치 자체를 정치의 조건으로 보는 랑시에르의 기본적인 논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제목은 기자의 ‘무지’가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어떤 ‘의지’의 표현일까?

                                 해외 학자 초청강연의 새로운 가능성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랑시에르의 강연 네 개가 모두 대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 역시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대학생 또는 지식인이 지닌 어떤 지적/담론적 권위에 대해 랑시에르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의 논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 다시 말해 그의 논의가 가장 먼저 전달되고 전유되어야 할 곳은, 지식인/대학생의 자리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질 몫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자신들을 정치적 주체로 조직하고 형성하는 자리가 아닐까.
  말하자면 이는 정치에 대한 랑시에르의 사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적용해 이 강연들이 지닌 어떤 독점적인 ‘장소’와 제한적인 ‘청중’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는 개인적인 제언일 뿐이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랑시에르의 정치적 논의들을 일종의 ‘무기’로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 강연들이 진정 ‘개방적’일 수 있을까 묻고 싶다.
  이런 문제점들과는 별개로 이번 랑시에르의 방한강연은 기존의 해외 학자 초청강연과는 다른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 각각 다르지만 서로 연결되는 주제들로 이뤄진 네 개의 강연은 랑시에르의 저서를 단순히 요약하거나 정리한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뛰어난 논의의 밀도를 갖고 있었으며, 청중의 반응도 다채롭고 뜨거웠다. 거액의 ‘출연료’를 지불하고도 단순한 요식행위에만 그치는 방한강연들이 심심찮게 있어왔던 한국 상황에서 랑시에르의 강연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번 방한은 학교나 학술단체 차원의 초청이 아니라 현재 랑시에르의 책을 열정적으로 번역하고 공급하고 있는 출판사와 번역자들의 헌신적인 합심으로 인해 가능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었다. 이는 향후 해외 학자의 방한강연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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