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 / 다중네트워크센터 공동대표

  안토니오 네그리에게서 ‘삶권력’은 탈근대에 가능해진 권력이다. 근대의 권력은 삶권력이기 전에 ‘국가권력’이었고, 중세와 고대의 권력은 그것과 또 다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탈근대적 삶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에서 삶권력으로의 이행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권력은 위로부터 노동을 생산하고 조직하는 권력이다. 시초축적의 역사는 노동의 탄생과 발전이 국가폭력에 의해 달성됐음을 보여준다. 푸코의 표현을 원용하면, 근대국가는 ‘노동하게 만들면서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국가는 노동을 매개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노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권력에 의해 노동시간을 삶시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이다.
노동사회로서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더 많은 삶이 노동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노동영역은 점점 삶의 물질적 생산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비물질적 생산영역에까지 확장된다. 심지어 소비활동조차도 노동활동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결과적으로 탈근대적 상황에서는 삶 전체가 노동으로 편입되어 삶과 노동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삶의 모든 시간이 (포섭의 방식뿐만 아니라 배제의 방식을 통해) 노동활동으로 편입되면서 삶시간과 노동시간의 구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자본은 불가피하게 삶 자체와 대면하게 되고, 노동시간에 대한 착취보다 삶 자체에 대한 수탈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국가권력에서 삶권력으로, 다시 삶능력으로

  이처럼 삶시간으로부터 노동시간을 분절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노동시간의 조직화에 기초했던 근대적 주권형태, 즉 국가형태가 위기에 직면하고 새로운 주권형태가 모색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보편적 삶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전지구적 주권형태, ‘제국’이 모색된다. 그것은 사람들을 ‘쉼 없이 살게 함으로써 수탈하는 권력’이다. 삶권력이 탄생하는 역사적 맥락이 바로 이것이다.
  삶권력은 삶시간과 직접 대면한다. 노동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이었으며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의 분절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그것은 측정 가능했고 또 측정되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삶시간은 모든 존재들이 탄생하고 생산하고 교통하기를 반복하는 영원의 시간이고 측정 불가능한 시간, 척도 외부의 시간이다. 나아가 그것은 권력(pouvoir)의 척도 너머로 움직이는 창조적 능력(puissance)으로서의 활력이다. 근대국가와 자본은 노동시간에 대한 가치화 체제를 확립해 삶활력에서 노동력을 분절했다. 근대 자본은 이처럼 삶에서 노동을 분절하는 것에 의존했다.
  삶시간 전체에 가해지는 자본의 포섭은 자본의 권력 증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자신의 척도권력(가치법칙)을 잃고 늪으로 빠져듦을 의미한다. 그래서 탈근대적 삶권력은 직접적으로 삶활력을 자신의 축적기반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사활을 걸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금융화, 유연화, 정보화는 삶을 축적기반으로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전술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도들 속에서 권력의 삶에 대한 의존성은 좀더 선명히 드러난다. 네그리가 오뻬라이스모(1960년대 이탈리아의 ‘노동자주의’ 운동) 시기 이후 권력에 사로잡힌 ‘과학적’ 시선을 비판하며 제기해온 노동과 저항의 우선성 테제는 삶능력의 우선성에 대한 단언이다. 척도 너머의 삶능력을 지배하기 위해 권력이 선택하는 것은 명령과 폭력의 길이다. 삶권력의 원천은 삶이고, 그래서 삶권력은 살게 해야 한다. 하지만 삶권력에게는 살게 할 힘이 없다. 왜냐하면 삶권력은 축적된 권력이고 축적되고자 하는 권력인데, 축적은 산 것이 삶의 영원한 시간에서 벗어나 죽는 과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권력은 살게 해야만 하나 죽게 할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모순이다.

                                제국시대의 전쟁에 대항하는 전쟁

  삶권력의 시대가 예외권력에 기초한 보편적 전쟁과 죽임의 상태, 비상적 예외의 시대(조르지오 아감벤)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테러에 대한 전쟁’은 이 보편전쟁을 알리는 암구호이다. 명령으로 삶시간과 대면하는 삶권력은 삶능력 앞에서 공포 이외의 다른 것을 느낄 수 없다. 삶권력은 척도 바깥에서 척도 너머로 움직이는 창조와 약동의 삶시간을 테러로 받아들인다. 군사적 전쟁, 정치적 치안, 경제적 박탈, 정보적 감시 등은 삶능력에 대한 전쟁이 수행되는 폭력적 방식들이다. 삶권력은 삶능력을 배태하고 출산할 산모가 아니라 삶능력의 피를 빠는 흡혈귀이다. 영구전쟁을 가져오는 제국이 드러내는 안보불안은 삶권력이 삶능력에 과잉면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면역결핍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네그리는 ‘전쟁에 대항하는 전쟁’을 삶능력의 노선으로 제시한다. 삶능력은 오늘날 다중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다중의 삶능력은 자신이 제국과 대칭적인 강력한 폭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비폭력주의를 통해 제국의 폭력독점을 (고발하되 실천적으로는) 묵인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삶능력은 무엇보다 창조력이며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구성력이다. 이 힘은 권력과 삶이 아니라 특이한 다중들이 서로 반려종(다나 해러웨이)으로서 협력할 것을 요구한다. 상보적 면역체계의 패러다임(로베르토 에스포지토)도 삶과 권력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보다는 특이한 다중들의 협력적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이것은 민주주의적 구성의 과학(제임스 매디슨)을 혁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삶능력의 이 민주주의적 구성과정은 살게 하기 위해서 죽이기를 반복하는 삶권력의 폭력기관들을 무력화하거나 해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블라디미르 레닌). 그러나 이것을 위해 삶능력이 민중의 권력을 위해 행사됐던 대항폭력과 같은 것이 될 필요는 없다. 대항폭력은 주권이 행사하는 폭력처럼 누군가를 예속시킬 다른 주권을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중의 삶능력이 행사하는 폭력은 삶권력의 폭력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다중의 탈주를 용이하게 하며, 특이한 존재들 사이의 소통을 확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협력을 생산하는 힘’이어야 할 것이다. 네그리에게서 ‘제헌권력’이라는 사법적 개념은 기존의 권력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협력을 생산하는 삶능력의 이 두 측면을 함축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