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편집위원 / jaewoni@cauon.net

  “우리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가상(假想)과 직접 싸우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과 싸워야만 한다.” 지난 2006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인간해방의 적’인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오늘날 ‘추상적인 구조적 지배’를 지칭할 뿐이다. 무릇 모든 투쟁은 구체의 층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이 바로 이와 같은 구체의 층위인데, 바디우가 그것의 다른 이름으로 지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이다.
  바디우의 논리에 동의하든 안 하든, 오늘날 많은 사상가들은 민주주의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위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파의 말처럼 비민주주의적인 세력의 도전에 의해 야기된 것이든, 좌파의 말처럼 스스로 민주주의적이라고 자임하는 자들의 오만에 의해 야기된 것이든 민주주의는 늘 위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9.11사건을 전후로 미국이 보여준 군사적 독선과 서브프라임 위기로 절정에 달한 금융위기가 가져온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 진폭과 파급력에서 전례가 없다고 할 만하다.

                                 이성의 법정에 오른 민주주의

  이와 관련해 현재 전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사상가들이 정치철학자로 분류될 수 있으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화두 중 하나로 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은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가령 민주주의의 전파자를 자임하는 미국이 타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권문제를 들이댈 때 정치의 도덕화(코소보,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그들 나라를 공격한다)는 도덕의 정치화(그들 나라는 악의 축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로 뒤바뀐다. 지젝은 이처럼 인권을 위해 인권을 침해하는 역설에 맞닥뜨린 민주주의가 여전히 민주주의일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바디우를 위시로 한 자크 랑시에르, 자크 데리다, 클로드 르포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은 민주주의라는 어떤 확고한 대상을 전제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테마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 위기를 사유한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사유하려고 하는데, 서로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를 국가형태 혹은 통치형태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랑시에르는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대한 면밀한 독해를 통해 민주주의 개념을 분석하면서, 어원 그대로의 의미(인민의 지배)에서의 민주주의는 결코 실현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메넥세노스>(238c-238d)에 나오는 페리클레스의 명제(“아테네인의 통치는 민주주의라고 명명되지만 현실에서는 귀족제, 즉 다수자의 찬성을 얻은 최고로 뛰어난 자의 통치이다”)를 분석하면서 이와 유사한 쟁점을 전개하는 데리다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즉, 데리다는 ‘우정’이라는 개념을 정치철학의 새로운 사유 대상으로 제시한다. 성인 남성들간의 친교에 근거한 호혜성을 뜻하는 그리스의 우정은 기독교 전통의 ‘형제애’(fraternity) 개념으로 이어지며 서구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해왔다는 것이다. 
  르포르는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목을 베었던 프랑스혁명의 예를 환기시킨다. 르포르에 따르면, 프랑스 인민들은 국왕을 참수함으로써 국왕의 자연적 신체만 없애버린 것이 아니다. 그 자연적 신체에 구현된 또 다른 신체, 즉 국가의 구현체로 여겨지던 국왕의 정치적 신체까지 없애버린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권력의 공백을 민주주의가 정초된 순간으로 해석하는 르포르에게 민주주의란 선거, 이해집단, 경쟁하는 의견들이 임시적으로 서로 대체해가면서 그 공백을 점유하는 형식적 구조일 뿐이다.

                                     위기에서 기회를 사유하기

  이 사상가들의 논의를 참조한다면 오늘날 운위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히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민주주의 자체에 내재된 모순이 더 이상 은폐될 수 없게 된 사태(지젝), 혹은 보편적 평등 공리로서의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랑시에르와의 인터뷰 참조)이다. 또한 우정·형제애에서 배제된 타자들(여성, 아이, 노인, 이주민, 이방인 등)에 대한 환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인 셈이고(데리다), 권력의 공백이 꽉 막혀버린 형국이다(르포르).
  언젠가 처칠은 “민주주의란 최악의 통치형태이다. 단, 지금까지 존재한 다른 통치형태를 제외한다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좋은 제도는 아니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더 좋은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사상가들은 이에 맞서 “민주주의란 그저 최악인 것이 아니라 ‘아주 최악’의 통치형태”라고 말한다. 이 ‘아주 최악’의 통치형태인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통해서, 또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을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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