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원 / 대중문화평론가

  지난 10월 탤런트 최진실의 자살은 여러 면에서 많은 여운을 남겼다. 탤런트 안재환이 자살하고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에 일어난, 그것도 상당 부분 연계를 갖고 있는 사건이어서 미디어와 대중의 주목도는 남달랐다. 그러나 안재환과 최진실은 같은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음에도, 그 사회적 영향은 판이하게 달랐다. 안재환의 자살이 사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일으켰다면, 최진실의 자살은 인터넷 폭력에 대한 재조명을 촉구했다. 가칭 ‘최진실법’으로 명명된 ‘사이버 모욕죄’ 신설안까지 등장했다. 이후 장채원, 김지후 등 연예계 인물들이 잇따라 자살하자 최진실 자살을 기점으로 베르테르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는 분석이 등장했다. 말하자면 자살 ‘트렌드’가 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연예인 자살사건 증후군을 돌이켜보면 이를 딱히 트렌드라 규정짓기엔 무리가  있다.

                             자살문화 규명할 깊이 있는 담론 필요

  연예인, 그것도 어느 정도 위상과 카리스마를 지닌 연예인의 자살은 분명히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베르테르 효과라 불릴 만한 자살 도미노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 부분 해당 연예인 팬덤에서 벌어지던 일이었다. 미국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 리더 커트 코베인의 자살 뒤에도, 일본 비주얼 록밴드 ‘엑스재팬’ 기타리스트 히데의 자살 뒤에도 팬덤 내에서 일시적으로 패닉 현상이 일어나 자살 도미노가 일어난 일이 있다. 어찌 보면 십분 이해가 갈 법도 한 일이다. 현대 대중문화산업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하나의 아이콘을 ‘아이돌’, 즉 종교적 우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그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팬덤에 있어, 해당 아이콘의 죽음은 하나의 ‘믿음’이 소멸되는 사건이 되고,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거의 경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어느 문화권에서건 연예인의 자살이 ‘동종업계 종사자’에게 전이돼 도미노 효과를 일으킨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회심리학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최진실의 자살에 이은 장채원, 김지후 등의 자살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먼저, 이들을 과연 ‘연예인’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트랜스젠더로 알려진 장채원의 연예계 활동은 사실상 전무했다고 보는 게 맞다. 지난 2004년에 SBS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진실게임>에 여장남자로 출연하고, 2007년에 성전환수술을 마친 후 같은 프로그램 ‘성형수술의 모든 것, 진짜를 찾아라’ 편에 출연했다. 그게 다다. 이후로는 ‘연예계 데뷔 준비 중’이라는 소식뿐이다. 사실상 일반인이다.
  동성애자 커밍아웃을 한 김지후 역시 마찬가지다. 2007년 송지효 패션쇼, 장광효 옴므 컬렉션에서 모델로 활동하고, SBS <놀라운대회 스타킹>, tvN <커밍아웃>에 출연한 것이 확인된 그의 경력 전부다. 딱히 연예인이라 말하기는 힘든 위치다. 둘 다 ‘연예계 지망생’ 정도로 불리는 게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자살이 최진실 사건에 굳이 묶이게 된 건, 언론의 역할이 크다. 언론은 논란과 파문이 심화되고, 장기화되길 기대한다. 그러다보니 연예인이라 보기도 힘든 이들까지 한데 묶어 하나의 증후군으로 확대해석하려 든 것이다. 사실상 장채원과 김지후의 자살은 최진실의 베르테르 효과라기보다, 한국사회에서 성적소수자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억압의 결과로 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옳다. 사회적으로 더 적절하고 깊이 있는 담론이 될 법했던 사건을, 미디어의 ‘탐욕’이 오히려 막아 세운 경우다.
  한편 안재환과 최진실의 자살 이후 팬덤도 아니고 동종업계 종사자도 아닌 일반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속출하기도 했다. 연탄과 붕대라는 자살도구가 정확히 일치했던 경우다. 이런 경우에는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이 실제로 작용한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도 개념상의 추측일 뿐 많은 의문을 사왔다.
  연예인을 포괄한 ‘공인’은 사회적 지표로서 작용하게 된다. 이 지표가 기능하는 부분은 삶의 행동철학이나 사상적 차원이 아니다. 다분히 기술적인 부분에 관여하게 돼 있다. 결국 안재환, 최진실의 자살이 남긴 사회적 지표로서의 역할은, 잠재된 자살위험군에 있어 자살 ‘방식’을 각인시킨 정도라는 판단도 가능해진다. 넓게 보아 하나의 ‘심리적 계기’로서 이미 한계까지 도달한 자살위험군을 일시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여전히 미지수다. 한 번 패닉현상이 일어난 뒤, 공인의 죽음이 더 이상 미디어의 화젯거리가 되지 못하면 유사한 방식의 자살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베르테르 효과 범주가 예상보다 훨씬 좁음을 반증해준다.

                           ■ 프리다 칼로, <도로시 헤일의 자살>(1938)
                                 

                            자살을 양산하는 사회·문화·경제적 요인

   일각에선 한국이 10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점을 들어, 한국사회만의 독특한 문화 환경이 국민을 자살로 이끌고 있다는 분석을 내리기도 한다. 여기에 연예인들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과, 이은주·정다빈 등 연예인들의 자살이 이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주장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자살사이트 등 복잡하고 극단적인 인터넷 환경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더 쉬운 답도 있다. 자살률은 근대사회에 있어 경제불황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어왔다. 경제불황은 사회불안을 일으키고 대중심리 혼란을 야기하며 개개인의 사회적 의지와 윤리도덕관을 해체시킨다. 즉 자살이  급증하기 쉬운 환경이 되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10년간 자살률 1위’가 시작되었던 1998년은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 본격적인 경제불황에 접어들었던 첫 해였다. 이후 이른바 ‘잃어버린 시대’가 10년째 계속되는 중이다.
  특정한 사회 기류 변화에 있어 그 문화적 요인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은 절대 헛된 일이 아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요소가 한데 뒤얽혀 흘러가는 것이 세상의 구조다. 그러나 그 어느 문화 환경도 ‘자살’과 같은 극단적 사고를 트렌드로서 유도하진 못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연예인 자살사건은 상당 부분 인터넷 폭력의 문제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한국의 전반적 자살급증 현상은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불황 상황과 맞물려 생각해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는 거대한 흐름이나 조짐, 예기치 못한 질서가 서려 있는 현상이 아닌 것이다. 쉬운 결론이지만, 연예인들이 지닌 특유의 사회문화적 폭발력 탓에 단순한 답이 가려진 경우다. ‘세상을 뒤흔들지 못하면 연예인이 아니다’라는 말도, 그러고 보면 꽤나 정확한 지적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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