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헌 / 철학아카데미 상임연구원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생명철학자 중 하나인 키스 안셀-피어슨(1960~ )은 영국 워릭대학의 철학과 교수이다. 그는 초기부터 독일철학과 니체를 꾸준히 연구해온 ‘니체주의자’다. <니체 대 루소>(1991)를 비롯해 다양한 니체 관련 논문과 저작을 발표하고 있는 것은 물론, 영국에서 니체학회를 창설했고 관련 연구자들의 국제 학술지 <니체연구>의 편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들뢰즈주의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대략 <바이로이드 라이프>(1997)라는 독특한 니체 연구서의 출간을 기점으로 한다. 그는 이 책에서 니체의 역능의지, 영원회귀, 초-인 등의 개념을 특별히 들뢰즈의 관점에서 생명과학적 층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생명철학에 근거한 ‘탈인간적 윤리학’의 정립에 천착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피어슨은 일반적인 주석가들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즉 생명철학적 윤리학의 측면에서 들뢰즈를 ‘반복’한다. 물론 이때의 반복은 들뢰즈 식의 진정한 반복, 즉 반복을 거듭할수록 새로움이 산출되는 ‘차이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런 들뢰즈 반복은 국내에도 이미 번역된 <싹트는 생명>(1999)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크게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손 등을 통해 미분되고 재적분되어 새롭게 계열화된다. 즉 피어슨은 바이스만이나 프로이트 같이 일반적인 주석가들의 시선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들뢰즈의 사상적 애벌레-주체들을 재/발견하고 재/계열화함으로써 소위 재현적 반복이 아닌 들뢰즈¹, 들뢰즈², 들뢰즈³……의 방식으로 차이를 반복한다. 이처럼 ‘잠재적’ 들뢰즈의 현실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피어슨은 들뢰즈의 반복(론)을 제대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차이생성적 해석은 <철학과 잠재적인 것에 대한 모험>(2002)이라는 후속작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피어슨은 베르그손의 잠재성의 철학을 중심으로 생명과 지속으로서의 시간 문제를 흥미롭게 탐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바이로이드 라이프>와 <싹트는 생명>을 잇는 피어슨의 생명철학 3부작이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빠른 시일 내에 나머지 책들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요컨대 피어슨은 들뢰즈를 재현이 아닌 반복의 방식으로, 영미철학뿐만 아니라 독일철학과 프랑스철학을 자유롭게 가로질러 자신만의 생명철학적 윤리학을 정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계속 주목해볼 만한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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