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삶정치’는 유(類)로서의 삶에 대한 통제, 생명과 삶의 형식을 분리하는 움직임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해러웨이에게 본래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합쳐야만 하는 생명과 삶의 형식의 균열은 없다. 여성/남성,  인간/동물, 자연/문화 같은 이분법의 경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지대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인 구성물이다. 그 경계에서 우리는 어떤 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
지배체제는 타자들의 연대와 기술의 재전유라는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가령 인간의 암 발생 유전자를 재조합해 세계 최초로 특허생명체가 된 온코마우스는 자본과 과학을 통해 조작·생산됐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친족의 형상이다. 그들은 분명 고통을 겪지만 우리를 ‘대속’(代贖)하는 순수한 생명체는 아니다. 이론가들이 거듭 내리는 서글픈 사형선고에도 불구하고 “큐사인에 맞춰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그들은 전유되지 않는 타자들이다. 전유를 위한 ‘생명 자체’는 자본 혹은 이론이 낳은 도착적 시각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정작 질문해야 할 것은 이렇다. 어떻게 그들의 고통을 ‘공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과 더 책임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해러웨이에게 ‘책임’은 대화를 통해 내재적으로 구성되는 ‘응답의 능력’이다. 그런 대화를 통해 ‘다른 곳’의 가능성을 계속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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