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선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다나 해러웨이(1944~ )는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대학의 의식사(意識史)학과 교수로 영장류학, 면역학, 유전공학 등 여러 기술과학 분야들을 여성, 불안정 계층, 유색인, 실험동물과 같은 ‘타자들’의 관점에서 비평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특히 최근에는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형상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다룬 <반려종 선언: 개, 사람, 그리고 중요한 타자>(2003)를 발표하고, 종과 종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바이오테크놀로지, 즉 공진화(coevolution)에 근거해 삶정치의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미셸 푸코의 <진료소의 탄생>을 유머러스하게 비튼) “개집의 탄생”을 다루는 <반려종 선언>은 독자들을 “삶을 위한 개집 속으로 초대”한다. 해러웨이는 개와 인간이 유전적·문화적으로 서로 길들이며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전지구적 내전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새로운 정치 형상을 찾는다. 그러나 길들이기는 요즘 유행하는 이론들에 비춰볼 때 삶정치적 권력의 대표적인 작동방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는 야생의 고귀함을 내던지고 걸식에 만족하는 타락한 동물이다. 인간 자신은 성·계급·인종을 비롯한 여러 통제장치의 낙인들로 얼룩졌고, 그 낙인의 안팎 모두에서 극단적으로 ‘동물화’되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 동물과 공진화하게 됐는가?

사실 해러웨이와 그의 반려견 미즈 카옌 페퍼 모두가 ‘여성’과 ‘동물’로 타자화된 존재다. 그들은 이 시대의 삶정치적 제도들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 모두 ‘타자’라는 이유로 ‘우리’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다.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카옌은 소유물인 ‘애완동물’이자 ‘순종 암캐’이고, 해러웨이는 전문직인 ‘교수’이자 ‘백인 여성’이다. 해러웨이는 증명사진이 첨부된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 완경(完經)을 맞아 번식을 중단했지만, 카옌은 목덜미에 마이크로칩을 이식받았고 일찌감치 중성화수술을 받았다.
또한 해러웨이도 고백하듯이 60대 여성과 중년의 개로 이뤄진 한 쌍은 ‘사이보그 전사’의 맞수가 안 된다. 그들이 맞서려 하는 적은 첨단기술로 무장한 사이보그 네트워크, 즉 다국적 곡물회사나 대(對)테러 군사작전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좋은 소식은 그들이 ‘사이보그 전사’는 상상한 적도, 상상할 수도 없는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밝은 면만 보자는 단순한 주장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이 점과 관련해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1985)에서 정치를 위한 방법으로서 아이러니가 갖는 힘을 탐사했다. 아이러니는 의도나 예측을 벗어나는 결과에 대한 것으로, 권력을 조롱하며 무효화하는 수사적 장치이자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지 않고 읽어내는 시각이다. 해러웨이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정치적 생존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사랑과 분노 모두를 훈련할 필요가 있다. 조금 더 살만한 세계의 가능성은 모두가 강렬해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중적인 시각에서 비롯된다. “두 시각 모두에서 바라보는 것이 정치투쟁이다.”
개-인간의 삶정치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개들이 이론을 만들기 위한 대리물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함께 살기 위해 여기에 있다.” 철학적 존재론이나 생체실험, 식육이나 유기(遺棄)가 개와 인간이 관계를 맺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이 둘의 관계는 때로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고통이 일차적인 관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개와 인간은 어떤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가? 한 연구에 따르면 개는 침팬지에 비해 인간과 몸짓언어를 보다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다고 한다. 개와 인간은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아질리티 경기(인간과 개가 함께하는 일종의 장애물 경주)를 함께 즐긴다. 게임의 언어는 인간의 것도 아니고 개의 것도 아니어서 그들 스스로도 거의 이해할 수 없지만 함께 즐겁게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목축문화에서 개는 생존을 위한 반려자다.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은 반려견과 더불어 보다 높은 치유율을 보인다.
사실 동거는 현대의 상품생산용 재조합 기술보다 유서 깊고 강력한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하나다. 첨단기술 자체도 본래 있던 자연의 기술을 전유한 것이지만, 동거는 그런 조작 없이도 상대방의 유전적 구성에 영향을 줄 수 있게 한다. 예컨대 일상적인 접촉을 통한 감염, 즉 바이러스 벡터(운반체)에 의한 수평적 유전자 교환은 서로의 신체에 상대방의 유전자 절편을 재조합해 넣는다.
또한 한 집에서 살도록(동거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길들이기(domestication)다. 길들이기는 다윈적 선택의 사례로 두 종 모두의 유전적 구성을 좌우하는 공진화 과정이다. 이때 길들이기의 과정은 ‘자연’에 한정되지 않는다. ‘자연문화’(natureculture)라는 하나의 장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치기와 사냥개 같은 개의 품종은 그 품종이 발원한 지역에서 인간과 개가 동거해 온 구체적인 문화와 상호 길들이기의 역사를 반영한다. 여기서 삶과 생명이 분리된다는 것은 허상이다.

반려종과 더불어 사유하는 지배와 해방
이렇듯 해러웨이는 상대편 없이는 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는 종들, 자연문화적 역사를 공유해온 종들을 ‘반려종’이라 부른다. ‘반려자’(companion)라는 말은 ‘빵을 나눈다’(com panis)라는 말을 어원으로 한다. 이해관계의 함의를 강조할 수도 있지만 식구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는 말이다. 반려종은 대개 길들이기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여기서 누가 누구를 만들고, 누가 주체이며 대상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다른 반려종인 인간과 옥수수를 예로 들어보자. 옥수수는 스스로 번식할 수 없고, 인간이 껍질을 벗겨 뿌려줘야만 자라날 수 있다. 옥수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연장된 번식기관이다. 물론 인간은 옥수수의 포식자다. 하지만 옥수수는 그 덕분에 지구상 식물 거주지역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인구학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한다.
해러웨이의 표현처럼 계급, 성, 평화, 환경, 동물권리에 관련된 의식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군사주의, 인간중심주의 같은 여러 ‘-주의’들이 “우리에게 강제로 떠안겨준 성과”다. 여기에는 두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지배의 아이러니는 어떤 통치기술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해방의 아이러니는 지배에 대한 분석이 탁월할수록 지배의 체험을 강화한다는 데 있다. 반려종은 지배와 해방의 가능성 모두를 포함하며 사랑과 분노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반려종은 순수하지 않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그들에게서 ‘재활용 가능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론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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