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진 / 본교 문예창작학과 강사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숲, 2008)

천병희 선생이 옮긴 희랍비극 전집 중 첫 두 권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나라엔 희랍비극 전집이 없었다. 현대까지 전해진 희랍비극 전체 33편 중 우리말로 옮겨진 것은 18편뿐으로, 사실 이것도 모두 천병희 선생이 옮긴 것이다. 단국대학교출판부에서 나왔던 그 번역들을 고치고, 나머지 15편을 새로 옮겨 더한 것이 이번 번역이다. 이번에 국내에 새로 소개된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 3편,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2편으로, 내년 초에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까지 나오면 희랍비극 전집이 완결되는 것이다. 그쪽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우울하던 요즘 분위기를 일신할 만한 쾌거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 선물을 찬찬히 살펴보자. 이 글에선 희랍비극의 ‘대표’격인 <오이디푸스 왕>만 보겠다. 이 작품은 이번에 새로 옮긴 것은 아니고 이전 번역을 조금 고친 것이다. 옮긴이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 어색한 표현을 줄이고 가독성을 높인 것이 눈에 띈다. 한데 번역사업 지침에 자주 등장하는 이 ‘가독성’이란 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지금부터 2천5백여 년 전 지구 거의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의 글을 옮기는데, 그것이 술술 읽히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 아닌가? 중요한 내용을 다 보존하고서도 매끄럽게 만든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확성’에서 아쉬움 남긴 번역

희랍사람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내 이오카스테를 향해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여”(단국대판, 950행)라고 부른다. 사실 이것도 약간 부드럽게 한 것으로, 희랍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아내 이오카스테의 가장 사랑스런 머리여’가 될 것이다. 한데 이번 번역에서는 이 구절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이오카스테여”가 되었다. ‘머리’가 사라지고 대신 원문에 없는 ‘세상에서’가 새로 붙은 것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이전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낯선 것은 낯설게 옮기고, 없던 것은 되도록 덧붙이지 말자는 것이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문제되는 것 중 하나가 존대법이다. 나는 서양말에 원래 존대법이 없으니 번역에서도 존대법이 너무 두드러지게 쓰지는 말자는 쪽이고, 옮긴이도 이전 번역에서 그 원칙을 대체로 지키는 듯했다. 그런데 새 번역에서는 그것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옛날에 어린 오이디푸스를 구해줬던 노인이 그를 찾아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극존대가 새로 도입되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노인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극존대법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 분께서는 그대를 내 손에서 선물로 받으셨사옵니다.”(1022행) 이 역시 내게는 원문에 충실한 이전 번역(“내 손에서 받으셨습니다”)이 나아 보인다.
 이번 새 번역에서는 대체로 문장들이 이전보다 짧아졌다. 너무 단어 대 단어로 옮기다보니 문장이 늘어지는 걸 피하자는 의도일 텐데, 때때로 이런 노력 때문에 ‘시’가 사라지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비극 작품은 전체가 운문이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나 다 시라 할 수 있지만, 특히 합창단의 노래 부분이 더욱 그렇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혈통을 알아내기 직전, 합창단은 자기들의 왕이 혹시 신의 아들이 아닐까 노래한다. “내 아들이여, 대체 누가 …… 그대를 낳았는가?”(1097~1101행) 그런데 이 구절에는 원래 반복법이 쓰였다. 단국대판에는 “누가, 내 아들이여, …… 누가 …… 그대를 낳았는가?”라고 해서 원뜻을 약간 살려놓았고, 희랍어 원문은 ‘누가 그대를, 누가 그대를’로 되어 있다.

의미 있는 국내 첫 원전 완역

요약하자면 상당히 뻣뻣한 희랍어 원문을 약간 누그러뜨린 게 지난번 번역이었고, 새 번역에서는 그게 더 부드럽게 고쳐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가독성’을 위해 ‘정확성’을 희생한다고 할 때, 그 한계가 이전 번역본(단국대판)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개선된 점도 없지 않다. 서양말들은 보통 종속문을 뒤에 자꾸 붙여가는 꼴을 취하는데, 우리말로 옮길 때는 그것들을 앞으로 옮겨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다가 때로 문장 뜻을 엉뚱한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번 번역에서는 이전에 잘못 옮겨졌던 종속문을 원래 자리로 옮겨 바로 잡은 것도 있었다. 또 하나 칭찬할 것은 편집과 책의 물성이다. 글자 간격을 좁히고 행 배치를 효율적으로 해서 쪽수가 적어졌고, 종이를 가벼운 걸 써서 책 무게가 의외로 가볍다. 독자와 환경을 많이 배려한 셈이다.
세부적으로 흠을 좀 잡았지만, 전체를 보자면 한량없이 기쁘고 옮긴이가 존경스럽다. 이제 드디어 우리도 희랍비극 전집을 갖게 되었다. 서양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손닿는 곳에 두고서 수시로 읽고 확인할 큰 보물이다. 정말 큰일을 해내신 천병희 선생에게 문화훈장이라도 드렸으면 싶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