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냉전정책과 연동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북한과 치열한 체제경쟁을 수행한 ‘냉전 전선 국가’였던 한국과 미국의 아시아 냉전정책의 ‘기지국가’ 역할을 요구받았던 일본은 전략적 이해관계를 일치시켜가면서 윈윈 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일간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및 독도 영토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방치되었다. 물론 김대중 사건으로 대변되는 ‘체제마찰’, 즉 민주주의국가인 일본과 권위주의국가인 한국 사이의 마찰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원만한 타결을 강요받았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발전, 일본의 경제대국으로의 성장은 한일관계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은 일본사회의 대한(對韓)인식을 전환시켜, 일본이 한국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한국 또한 이러한 발전을 통해 강대국에는 못 미치나 지역적인 패권을 가진 국가로서 독자적인 외교전략 하에, 대등한 한일관계를 구축하고 그 투사지역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장하려 했다. 한일 양국 외교에 있어 한일관계가 격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로 냉전시 전략적 이해관계 하에 방치되어 왔던 역사문제와 독도문제가 전면적으로 대두되었다. 권위주의 정부가 붕괴된 이상, 국민의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던 역사문제를 더 이상 한국정부가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90년대 이후 종군 위안부 문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등은 한일관계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해 일본은 고노 관방장관 담화, 무라야마 총리 담화 등을 통해 역사인식을 심화시켜갔다. 그러나 이는 일본 우익의 반동을 유발했고, 일본정부의 역사인식 심화를 무효화시키려는 망언이 빈번해 한일관계는 다시 냉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90년대 이후 등장한 전후세대 정치인의 주장은 한일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탈냉전 이후에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이 상호결합해 한일관계는 일정한 패턴을 반복해왔다. 즉, 새정권이 출범하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가하면서 순풍적인 상황이다가도, 말기에 접어들면 역사문제 혹은 독도문제로 인해 한일관계가 급격히 냉각되는 ‘V자형 구조’가 일반화된 것이다.

 

노무현 외교의 안티테제


이러한 한일관계의 ‘V자형 패턴’은 노무현정권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 노무현정권의 대외정책은 과도한 전략성과 정치성을 특징으로 삼는다. 노무현정권은 김대중정권의 햇볕정책을 계승하며 이를 국가전략의 핵심에 위치시켰다. 즉 평화번영정책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 과정에서 동북아 중심국가로 성장한다는 전략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평양 방문을 통해 북일 국교정상화 문턱까지 진입한 고이즈미 내각의 대북정책은 노무현정권에게 대일정책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따라서 고이즈미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도 불구하고 노무현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구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납치문제로 일본이 대북정책을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고, 동시에 2005년 시네마현의 ‘다케시마의 날’을 조례 제정하자 한국의 대일정책은 급속히 냉각되었다. 노무현대통령이 직접 대일정책 담화를 발표하고, 일본의 문제국가화 및 중국과 일본의 대립을 전제로 하는 ‘동북아 평화균형자론’이 발표되면서 과도한 정치적 대응이라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이명박정권의 실용외교는 이러한 노무현정권의 과도한 전략성과 정치성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했다. ‘이념이 아닌 국익을 바탕으로 하는 실리외교’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상황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이명박정권의 대외정책은 ‘대북정책의 주변화’를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즉 북핵문제의 주도적 해결이라는 과도한 전략성이 가져오는 폐해를 의식하며,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 국제협조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로써 한미동맹, 한미일 협조체제 및 한일관계, 한중관계를 순서로 하는 외교관계의 전통적 서열화를 재구축했다. 한미관계와 한일관계에 미묘한 긴장을 초래했던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함으로써 이들 관계를 정상화했던 것이다. 일례로 올 4월의 한일정상회담은 북한문제에 대한 일본과의 인식 차이를 허물어 한일관계의 긴장요인을 제거하며 한일관계를 구가하는 형상을 보였다.


다음으로 실용외교의 특징은 경제적 관념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실리라는 것은 결국 투입과 산출, 이득과 손실이라는 경제적 관념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은 이러한 실용외교의 경제적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반대급부로 얻어지는 전략적 이득, 즉 한미FTA 혹은 한미관계의 복원이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의 이유였던 것이다. 올 4월 대통령의 방일에 경제계 인사를 대거 대동하며 경제 분야에서 상당한 합의를 이룬 것 또한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 급격히 이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일 정권교체에 따른 실용외교 좌초 우려

 

그러나 실용외교의 실제 양상은 ‘과도한 전략성과 정치성’이라는 극단에서 ‘비전략성과 정치적 배려의 결손’이라는 또 다른 극단으로 나타났다. 북핵 해결의 주도권을 방기함으로써 전통적 우호관계인 한미·한일관계를 복원시켰지만, 한국 외교력의 근간인 북한문제에 대해 균형감각을 상실함으로써 외교의 활동폭을 제한하고 만 것이다. 또한 실용외교는 기본적으로 신네오콘의 미국, 납치문제의 일본이라는 국제관계 속에서 기능하도록 고안된 외교전략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권이 오바마의 민주당에게로 넘어갔고, 일본의 정권교체도 현실화되어 있는 시점에서 실용외교가 계속 정합성과 우호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실용외교는 ‘정치화된 문제’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 소홀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 파동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이득과 손실을 고려하여 쇠고기 수입이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정치적 배려는 불가결하였다. 그러나 실용외교에 사로잡힌 이명박대통령은 충분한 사전협의, 개방된 논의, 국민에 대한 홍보 등의 정치적 배려가 부족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려의 결손은 일본 중학교 사회과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문제가 명기됨으로써 대두된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2006년 12월, 일본에서 제정된 교육기본법에 “국가와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 즉 애국심 조항이 삽입되면서 교과서와 지도학습요령 및 해설서에 독도문제가 명기되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사실은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 실제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가 명기될 것이라는 보도가 5월경에 있었다. 물론 한국정부도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일본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한 가지 해명이 안 되는 것은 지난 7월에 있었던 G8정상회담 내에서 이루어진 한일정상회담이 15분밖에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정부는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명기할 것인가에 대한 최종판단을 G8정상회담 이후에 하겠다는 의사를 언론을 통해 밝혔었고, 한국도 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G8정상회담에서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정부에 독도관련 문제의 시정을 강하게 요구했어야 한다. 때문에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고 말하는 한국정부의 설명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결국 한일정상회담 며칠 뒤인 14일, 해설서에 독도문제가 명기되었다.


결론적으로 ‘비전략성과 정치적 배려의 결손’이라는 문제점을 내포한 이명박정권의 실용외교가 미국과 일본의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에서도 얼마만큼 기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북핵문제 해결에 주도권을 갖고 동북아 중심국가로 도약하겠다던 노무현정권의 외교전략이 신네오콘적 주변관계라는 불행한 국제환경 속에 좌초한 것처럼, 실용외교를 표방하는 이명박정권의 대외전략이 ‘역의미의 불행한 국제환경’ 속에 좌초하기 전에 대외전략의 재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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