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우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

  한 유명 연예인의 죽음이 한국사회에 많은 파장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가장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는 여당에서 추진 중인 ‘인터넷 통합법’일 것이다. ‘인터넷 통합법’은 자살한 연예인의 죽음이 인터넷 악플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때문이라는 가설과 동정 여론을 등에 업고 등장했다. 하지만 이명박정부의 현재 행태를 보자면, 굳이 누군가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유사한 법안을 어떤 식으로든 추진했을 것이다.
  현 정부가 촛불집회를 정점으로 해서 전방위로 벌이고 있는 ‘포털사이트 길들이기’와 특정 카페나 동호회 회원들에 대한 끈질긴 ‘보복’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이와 함께 최근 각종 사이트에서 금칙어 설정이 증가하면서 네티즌의 불만과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예전에도 포털사이트나 P2P 공유사이트를 중심으로 금칙어가 있었지만, 최근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네티즌의 일상적인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정도이다.
  이처럼 강도 높은 금칙어 설정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은 한 마디로 ‘어이없음’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수많은 홍길동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물러날 네티즌들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온라인공간에서 수많은 패러디물을 생산한 유경험자이며, 오프라인공간에서도 버스정류장의 글씨를 맘대로 바꿔놓는 등의 놀이를 즐겨왔던 이들이다. 이제 ‘어이없는’ 한국사회에서 네티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할지 지켜볼 일이다.

                            통제로 자율성과 상상력을 없앨 순 없다

  이제 금칙어 확대뿐 아니라 댓글에 대한 감시와 통제, 나아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여론을 억누르기 위한 ‘인터넷 통합법’의 등장도 멀지 않은 듯하다. 여당에서 입법 추진 중인 ‘사이버 모욕죄’만 하더라도 이미 형법상 명예훼손죄와 모욕죄가 있는데도 굳이 새로운 법안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온라인공간의 여론을 통제하려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더욱이 이 법안은 피해자의 고소·고발 없이도 임의 수사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그야말로 ‘헐~’이다. 이것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문화·사회·정치적 양상들과 무관하지 않다. 얼마 전 발표된 국방부의 ‘불온서적 리스트’나 ‘청소년 게임 이용 셧다운제’ 등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통제 강화’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러한 문화적 사건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단번에 바꿔놓진 않지만 어느 순간 대중의 일상을 바꾸고 의식을 억압하게 될 것이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체감시간은 이미 5년을 훌쩍 넘긴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많은 이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댓글을 달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아서 행동에 옮긴다고 한다. 이명박정부가 네티즌들에게, 대다수 국민들에게 준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질병 및 치료비 증가, 나아가 수명 단축 등을 생각하면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천문학적인 액수가 나오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그동안 조금씩 구축해온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폭력이나 인권 침해 등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향후 대중의 일상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현재와 같은 상황이 앞으로 몇 년 더 지속된다면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사어(死語)’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명박정부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동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피로감을 느끼면서 개인적인 문제, 즉 먹고 사는 문제에 천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금칙어 확대나 인터넷 통합법 등으로 통제가 강화된 현실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자율성과 상상력의 실종이다. 인터넷 민주주의의 핵심이 자유로운 개인들이 상상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의 제공이었다면,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아갈 것이 분명하다.

                                 놀면서 저항하기, 위험에서 기회찾기

  우리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듯이, 이명박정부의 공세는 전방위적이다. 공권력의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문화영역에서의 전쟁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역사교과서 개정 문제는 앞으로도 정부가 정책이나 제도, 심지어 법 등을 무시하거나 바꿔가면서 얼마나 오만한 자세로 국정운영을 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과거 군사독재가 횡행하던 7~80년대는 싸움의 국면이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일상의 통제와 억압도 있었지만, 주로 물리·정치적인 폭력과 억압에 대해 저항을 시도했고 그 결과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획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면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자본이나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차원에서 싸움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싸움의 전략과 전술이다. ‘인터넷 통합법’이나 포털사이트 길들이기 등 감시와 처벌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에 어떤 전략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전방위적 공세에 대한 전면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뿐만 아니라 피곤하다. 오래 가기 위해서는 전면전과 동시에 게릴라전이 필요하다. 놀이문화와 같은 즐거운 저항의 전략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강력한 통제사회 속에서 이제 저항은 한 개인이, 자신의 구덩이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구덩이는 서로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철학자 프랑수와즈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멋진 통찰을 제공해준다.
  “저항은 곡선을 그린다. …… 저항의 선은 급회전하며 거쳐가는 상황에 따라, 그리고 마주치게 되는 장애에 따라 연신 구부러진다. 그것은 매 순간, 매 경우마다 더듬어서 그려져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저항이 우유부단하거나 애매해서가 아니라 뒤틀려 있고 은밀하기 때문이다. 줄타는 곡예사처럼 불안스럽기 짝이 없는 상태로 있기, 위협받는 동시에 침공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있기, 거기에서 사방에 임박한 위협과 위험 그 자체에 숨어 있는 기회들을 식별해내기, 곧고도 구부러진 저항의 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다니엘 벤사이드, <저항: 일반 두더지학에 대한 시론>, 이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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