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 문신원 옮김 (에코의서재, 2008)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작가이다. 그가 쓴 자크 라캉 전기는 단순한 일대기의 차원을 넘어서 라캉이라는 사상가의 면모를 다각도로 조명한 책으로 정평을 얻었다. 확실히 그의 글은 매력이 있다. 아니 루디네스코 자체가 매력 있는 ‘여성’이다. 그의 글이 그를 닮은 건 그래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루디네스코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적 글쓰기를 한다는 따위의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모성이니 여성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치열성은 예외적 인간으로서의 여성, 말하자면 남성의 상징질서에 속하면서도 포섭당하지 않는 모종의 지점들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이런 글쓰기는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욕망의 위치에서 나온다. 주류의 시선이 놓치는 지점들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루디네스코의 글은 흥미를 자아낸다.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요즘 우리가 즐겨 쓰는 ‘엽기적인 것’에 대한 기술이다. 변태라고 번역했지만 실은 ‘도착’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사드는 법을 넘어선 혁명가다
이 책은 어떻게 정신분석학이 역사학을 만날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이른바 정신분석학의 스펙트럼으로 읽어낼 수 있는 문화사의 벽화를 만나는 것 같다. 이 벽화의 주인공들은 “사회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작품의 저자”이다(80쪽).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건, 이 책의 대상이 ‘저자’라는 사실이다. 루디네스코는 ‘기록을 남긴 자들(법)’이 ‘기록에 남지 않은 자들(법을 위반하는 주체)’을 증언하는 도착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다. 즉, 도착의 문제를 법과 주체의 관계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사드에 대한 이런 진술, “이제 동물성애, 페티시즘, 동성애, 수음, 펠라티오, 채찍질, 합의된 폭력 등 가장 도착적이라고 판단되는 변태 성행위들도 삶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기에 더는 법이 관여하지 않게 되었고 어떠한 처벌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99쪽). 사드를 찬양하는 듯한 저자의 관점은 라캉의 해석과 다소 다르다. 그는 사드에 대한 라캉의 평가를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라캉은 기본적으로 사드가 법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증거가 바로 <규방철학>이라고 했다.
루디네스코에 따르면 사드는 도착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법을 넘어선 혁명가처럼 보인다. 그가 주목한 건 사드가 정신병원에 수감당했다는 사실이다. 도착을 범죄의 문제로 판단하지 않고 병으로 봤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 깊숙이 관여한 건 이른바 생물학이다. 부르주아들은 자유사상을 옹호하며 실제로는 쾌락에 탐닉했지만, 공중도덕을 내세워 동성애, 동물성애, 시체애호증, 노출증, 소아성애증 같은 행위들을 변태적이라며 비난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인류 생존에 꼭 필요한 번식의 법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100쪽).

도착, 범죄에서 치료의 대상으로

이런 관점에서 부르주아들은 도착의 문제를 사법적인 차원에서 해결하지 않고 임상학적인 치료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주도권이 사법관에서 의사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기존의 도덕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도착의 문제를 부르주아들은 임상학의 범주를 도입해서 해결해버렸다. 그래서 도착증자들은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수감해야 하는 ‘짐승’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런 관점은 확실히 미셸 푸코와 같다. 주디스 버틀러가 정신분석학이라면 치를 떨었을 푸코를 훌륭한 정신분석학의 계승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루디네스코도 그렇게 한다. 루디네스코에게 와서 라캉은 부르주아들의 법체계에 도전하는 거대한 병기창으로 화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은 위험한 것’이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위악을 재현한다.
이 책은 독일 철학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면서 발전한 프랑스 철학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한다. 독일 철학에서 선험성이 외재적이라면, 프랑스 철학의 경우에는 내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 철학은 경험을 넘어선 선험의 영역으로 내재성을 설정하고 있다. 루디네스코의 책은 이런 선험성의 영역인 내재성이라는 것이 바로 무의식이고, 또한 도착을 발생시키는 충동의 집합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인가. 도착을 없애겠다는 어마어마한 현대사회의 착각을 폭로하는 것이다. “도착증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세계화된 자본주의 사회, 일명 포스트모던 사회의 새로운 유토피아”라고 루디네스코는 말한다(200쪽). 유기적인 삶을 차분히 관리하기 위해 “악, 갈등, 운명, 무절제를 제거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이런 태도야말로 새로운 도착증을 유발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얼마 전 국방부가 발표한 ‘불온서적 명단’을 상기해보면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위생학적 마인드야말로 사드보다 더한 도착증이 아니겠는가? 다른 동물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우슈비츠 같은 치밀한 동류살해행위를 도착의 문제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도착증에 대한 단순한 보고서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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