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 /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곧 한국사회에 공룡이 출현한다. 2008년 기준 한 해 예산 약 1조 원의 한국학술진흥재단과 1조5천억 원의 한국과학재단, 6백억 원의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이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될 예정이다. 정부발표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은 인문학, 사회과학, 과학을 통틀어 한 해 약 2조5천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의 학술연구 지원활동을 전담할 예정이다.
여러 곳으로 분산된 연구지원체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프로그램매니저(PM) 제도를 도입하면 연구자의 불편이 해소되고 전문성이 강화될 것이라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번 통합으로 “기초원천연구투자 확대”와 “기초연구지원시스템 효율화 및 선진화”가 이뤄져 “기초원천연구의 창조적 역량 극대화, 지식기반사회의 성장잠재력 확충, 과학기술 5대 강국 구현의 기초체력 강화”를 이룰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데 이 엄청난 규모의 통합이 실제 학술연구활동에 미칠 영향에 관해서는 아직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3개의 재단을 하나로 통합했을 때의 장단점에 관해 정부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연구지원체계를 일원화해야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다는 주장만 있을 뿐이다. 지난 8월 8일 학술단체협의회, (전국)인문과학연구소협의회, (전국)사회과학분야중점연구소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개토론회는 이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토론회에 참여한 학자들은 이번 통합이 성과주의와 관료주의를 따르는 발상일 뿐만 아니라 기초학문과 인문학의 위상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연구활동을 위축시키는 연구지원체계
기본적으로 이번 통합은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의 일부이다. 29개 공공기관을 13개 기관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한국연구재단이 설립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통합은 학술연구지원정책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 공공기관의 구조조정과 더 많이 연관되어 있다. 자연히 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학문의 과정보다 효과적인 결과물에, 학술연구의 다양성보다 국제경쟁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따라서 가시적인 성과를 낳을 수 있는 분야에만 예산이 집중될 것이다.
물론 인문한국(HK)이나 두뇌한국(BK21), 누리사업(NURI)처럼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업들이 갑작스레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재단의 통합이 학문후속세대의 삶을, 특히 인문학이나 기초학문과 연관된 학문후속세대의 삶을 지금 당장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원을 위한 ‘조건’을 고려하면 그 위협은 곧 드러난다. 그동안 학술진흥재단 지원의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되어왔는데, 이번 통합은 한국연구재단의 사무총장과 PM에게 더 많은 권한을 집중시켜서 ‘학문의 편향성’을 더 심화시킬 예정이다. 특히 심사자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경우, 권력을 가진 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연구지원사업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학계의 연구방향도 요동치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연구성과에 대한 양적인 평가를 보완하겠다고 밝히지만 그 질적 보완은 한국의 특성보다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를 것이다. 그러니 학문후속세대의 능력이 자기 전공에 대한 열정이나 능력보다 영어논문 작성능력으로 평가받는 왜곡된 현상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또한 학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인력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연구능력보다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이런 정책은 대학원 내부에도 영향을 미쳐 한정된 프로젝트를 놓고 대학 내에서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고, 교수는 마치 기업체의 팀장처럼 자신의 학생들을 훈련시킬 것이다. 학제간 연구는 상품일 뿐이고 대학원사회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업으로 변할 것이다.

대학을 바꿔야 학문이 산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정부와 대학은 소위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사업을 놓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해외의 석학을 유치해서 한국 대학의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높이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겠다며 정부는 5년간 1조 원에 가까운 예산을 쏟아 부을 예정이다. 많은 돈을 주고 해외에서 모셔온 소수의 석학이 한국 대학의 수준을 높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예산은 한국의 수많은 학문후속세대에게 쓰여야 할 예산에서 전용된 것이고 이를 통해 학문의 종속성이 더 심화될 것이다. 사실 학문후속세대가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은 국가나 기업같은 외부환경이 아니라 대학이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사학재단들은 그런 기본적인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 매년 엄청난 액수의 적립금이 쌓이지만 등록금은 늘어나고 연구에 필요한 돈마저 프로젝트를 통해 마련해야 한다. 외국의 학자를 서로 데려오려고 꼴사나운 경쟁을 벌이면서도 정작 시간강사들의 처우는 기본적인 보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후속세대의 미래를 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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