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일 / 문학비평가

일본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후계자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물론 일본의 한 비평가가 푸념했듯이, 예전의 대학원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진을 읽었다면, 요즘에는 히로키를 읽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히로키는 고진의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히로키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고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히로키가 <비평공간>에 연재한 글로, 연재 시작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그리고 3년 후 이 글이 묶여 출간되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함은 물론이고, 대개 소설에 수여되는 미시마유키오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아사다 아키라에게 “<구조와 힘>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찬사를 받으며 현재까지 수만 부가 팔려나갔을 뿐 아니라 만화로까지 출간됐다. 그 난해하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연구서가 이처럼 많이 읽혔다는 것은 확실히 일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물론 예외는 있다. 80년대에 <구조와 힘>은 20만 부 정도 팔렸고, 고진의 책도 대부분 수만 부씩은 팔리고 있다).
그러나 히로키는 이와 같은 화려한 데뷔 이후 철학사상 연구를 내동댕이친다. 그리고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오타쿠문화(하위문화) 연구에 매진한다.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은 바로 그와 같은 연구의 성과물 중 하나이다. 이것은 확실히 징후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생각보다 너무나 완고한 나머지 익숙한 분석대상이나 개념, 인명이 등장하지 않으면 한시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그런 한국의 인문학도들에게 히로키는 어쩌면 실망의 대상일 수 있다.
히로키 자신도 이와 관련해 많은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인문학(철학이나 사상) 연구 대신에 미소녀 게임이나 분석하고 있다니 재능이 아깝네”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히로키의 답변은 대충 이랬다. “내가 데리다에 관한 책을 낸 것은 하위문화 비평가가 되기 위해 일종의 지명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위문화는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지만 정작 주류 비평가들은 기존 틀에 갇혀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일관되게 무시해왔다. 그러나 나는 서구사상을 학습하며 조립하는 데 만족하기보다 실제 우리의 삶 가까이에 널려 있는 문화의 정체를 분석하고 싶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히로키는 새로운 사상가라기보다는 사상의 낯섦(새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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