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조 키에사 / 영국 켄트대학 유럽문화·언어학부 교수

<호모 사케르>로 유명한 조르조 아감벤은 삶정치를 권력이 아무런 매개 없이 순수한 생물학적 삶과 대면하게 되는 정치라고 엄격하게 규정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제국>의 안토니오 네그리는 늘 넘쳐나기 때문에 결국 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삶의 힘과 삶정치를 적극적으로 동일시한다. 비록 이탈리아 밖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오스: 삶정치와 철학>(2004)이라는 저서를 통해 기존의 삶정치 관련 논쟁에 핵심적이고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대학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에스포지토는 삶정치라는 개념이 최근 학계 전반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전히 적절하게 범주화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게(혹은 상반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령 네그리가 ‘장밋빛’처럼 묘사하고 있는 삶정치는 아감벤이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삶정치와 극도로 대비된다.

면역화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본 삶정치
에스포지토는 이런 불일치를 설명하려면 미셸 푸코가 삶정치라는 개념을 처음 정식화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개념상의 불확실성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푸코는 근대주권과 동시대 삶정치의 관련성 같은 핵심 쟁점에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푸코가 말한 근대주권과 삶정치라는 두 체제는 오직 죽음을 배경으로 해서만 각각의 의미를 획득할 뿐이기 때문에 양자가 서로를 배제하는지 안 하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한편으로 푸코는 삶정치의 지평 내에서 억압적인 주권 패러다임이 회귀하는 것처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 해방됨으로써 그 자체를 넘쳐흐르고 결국 그 자체에 맞서게 되면 주권적 질서가 궁극적으로 소멸된다”(에스포지토, “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삶정치: 한 개념의 이야기와 현재성>, 2005, 159쪽)고 정반대의 가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이런 난점은 푸코가 삶정치를 분석하면서 드러낸 더 심각한 문제의 부산물일 뿐인데, 푸코는 정치와 삶의 연관성을 외재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한다. 비록 정치와 삶이 서로에게 갖는 함의를 적절히 주제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푸코의 작업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궤도 내에서 근접해 있는 양극(삶과 정치) 자체의 윤곽이나 특성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160쪽)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의 독창성은 ‘면역화 패러다임’을 통해 이처럼 모호하게 정의된 정치와 삶의 유기적 연계성을 탐구한다는 데 있다. 그는 임신-출산의 생물학적 과정을 예로 들어 면역화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산모의 면역체계는 자기 몸속에 존재하는 태아의 상이한 면역체계에 내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아를 유산의 위험에서 막아주기도 한다. 이 경우에 면역은 이질적인 것을 가로막는 방어벽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질적인 것과 상호소통할 때 사용하는 ‘여과장치’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모가 자신의 몸과 태아에게 실천하는 생명의 보호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순수한 긍정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산모의 면역은 신생아에게 삶을 선물(munus)의 ‘형태’로 증여하는 것이자 나(산모)와 타자(태아)의 ‘집단적 현존’임과 동시에 ‘사회적 흐름’인 공동체성을 가능케 해주는 원인이다.
이런 면역화 패러다임에 입각해 삶(비오스)와 정치(노모스)의 관계를 보면, “양자는 한쪽이 다른 쪽의 세력권에 종속되는 외재적 형태로 덧붙여지거나 병치되기보다는 어떤 단일하고 확고한 전체의 두 가지 구성요소, 서로와의 관계맺음을 근거로 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두 가지 구성요소로 나타난다.” 요컨대 한 사회의 면역체계는 삶과 권력을 연결시켜주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삶이 지니고 있는 보존능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특정한 시기’에 삶과 정치라는 두 구성물이 조우해 생겨나는 결과물로 이해된 기존의 삶정치 개념에서 전제되는 것과는 달리, “삶은 결코 권력관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동시에 권력 역시 결코 삶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가능성, 혹은 도구일 뿐이다”(<비오스: 삶정치와 철학>, 41~2쪽).
물론 에스포지토는 자가면역성 질병의 예처럼 면역화의 과잉이 삶을 괴멸시킬 위험도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면역강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그 전형인데, 면역강박이란 면역화가 한계를 넘어설 만큼 팽창된 탓에 그 자체가 삶을 위협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처럼 “삶에 ‘부과되는’ 정치”, 즉 삶을 자신에게서 분리된 종속적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면역화 패러다임의 근거 자체를 폐제하는 삶권력에 맞서서, 철학자들은 “삶에 ‘대한’ 정치” 혹은 “삶‘의’ 정치”, 즉 ‘긍정적 삶정치’를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에스포지토는 주장한다.

긍정적 삶정치의 사유가 철학자들의 과제이다
또 한편으로 에스포지토는 출산이 ‘최악의 타나토폴리틱스’가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해주는 부정적인 삶정치의 범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유전적 규약을 활용해 독일을 갱생시키려고 했던 나치의 출산장려운동이 30만 명을 강제로 불임시킨 법률의 공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는 (르완다 내전에서 인종적 강간으로 이어진 ‘강제적 출산’ 같은 최악의 경우에서조차) 출산은 결국 “삶의 힘이 여전히 죽음의 힘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가장 전형적이고 고지식하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기독교계의 낙태반대 주장을 놀랍도록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그가 왜 나치즘을, 무엇보다도 출산을 두려워한 죽음의 정치로 간주하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명의 선(先)억압”(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미리 억압하는 것)이 나치의 가장 견고한 면역장치가 됐던 이유는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출산 자체가 나치의 인종 개념이 전제하는 ‘기원’의 “원초적 이중성”을 폭로함으로써 특정한 정체성(순수한 아리아족)에 근거한 나치 정치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제3제국에 거주한 사람들의 정치적 역할을 결정했던 것은 출생이 아니라 출생의 가치를 미리 결정해놓은 정치적-인종적 도식에서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였다.

로렌조 키에사(Lorenzo Chiesa)는 유럽 현대철학 전문가로서 올해 영국 켄트대학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상: 삶정치, 니힐리즘, 제국’을 기획·조직했다. 주요 저서로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으로 읽는 라캉>(MIT Press, 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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