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흥술 /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문학작품에 대해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은 할 수 없다. 문학작품은 ‘좋고 나쁠’ 뿐이다. 좋아서 감동을 줄 때, 그 작품이 유효한가를 따져야 한다. 작품의 유효성 여부는 그 작품의 역사성에 달려 있다. 유효한 작품은 그것이 발 딛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그 모순이 극복된 새로운 가능세계, 곧 그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요즘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판타지, <다빈치코드>처럼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한 팩션(faction), 그 외 추리·스릴러·SF 등이 ‘중간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힘을 합치면서 큰 세력을 형성해가고 있다. 젊은 여성을 뜻하는 ‘chick’과 문학을 뜻하는 ‘literature’의 합성어인 칙릿(chick-lit) 역시 중간소설의 핵심 장르로 여겨지고 있다. 칙릿은 원래 90년대 말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부터 출발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쇼퍼홀릭> 등을 거치며 영미권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소설들을 지칭하는 신조어이다. 이 칙릿이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만 하더라도 여러 문학상을 독식하며,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선점하고 있다.
영미권 작품들의 경우, 뉴욕과 런던 같은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를 무대로 하여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일상과 소비와 욕망과 사랑을 가볍고 흥미롭게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압구정동으로 표상되는 문화와 패션 중심지를 무대로 하여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명품을 소비하고 향유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젊은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칙릿의 음험한 상업적 측면

  칙릿이 좋은 작품인지 나쁜 작품인지를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먼저 칙릿에 나타나는 여성의 정체성 찾기 과정을 보자.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오늘 우리사회는 ‘인간, 남성, 이성, 도시, 자본가, 물질, 육체’ 등이 중심부를 형성하고, ‘자연, 여성, 비이성, 농촌, 노동자, 정신, 영혼’이 주변부로 밀려나, 중심부에 의해 주변부가 억압당하는 폭력적인 이항대립체제를 띠고 있다. 이런 체제에서 여성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일은 체제의 견고함 때문에 어렵고도 힘든 과정을 요구한다.
  칙릿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명품을 선호하고, 66사이즈가 44사이즈가 되거나 160cm의 키가 170cm가 되기를 바라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야만 멋진 남성과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예쁘고 날씬하고 명품으로 치장한, 그러면서 능력 있는 칙릿의 여성은 체제전복자인가 아니면 수호자인가. 폭력적인 이항대립체제는 남성중심주의, 상품물신주의, 외모지상주의, 출세제일주의라는 그물망을 치고 여성을 더욱 더 교활하게 얽어매고 있다. 칙릿의 젊은 여성들은 그 그물망에 길들여지고 통제되는 마네킹일 뿐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정체성 찾기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 차이만 있을 뿐이지 동일한 인간 존재이다. 그런데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여성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그 사회적 역할이 결정된다.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모순과 싸우는 것이 바로 ‘좋은’ 문학이다. 약육강식의 동물적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사회를 비판하고 그 사회에 식물적 상상력으로 격렬하게 맞서 저항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연작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칙릿이 자리한 출판자본의 이면을 돌아보자. 유효성의 측면에서 볼 때, 칙릿은 ‘나쁜’ 작품이다. 우리사회는 추악한 모순을 감추기 위해 온갖 화려한 이미지들로 자신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칙릿은 그 이미지의 세계를 가볍게 유영한다. 그런데 올해 들어 이 ‘나쁜’ 문학이 ‘문학상’을 받고 있다. ‘나쁜’ 문학에 문학상을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문학의 본질이 바뀐 것인가. 사태를 재구성해보자.
   문화산업을 표명한 출판자본은 상품을 팔아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 출판시장 조사를 해 보니 칙릿이 잘 팔린다. 그런데 칙릿을 팔자니 ‘나쁜’ 문학이다. ‘나쁜’ 문학을 상품으로 만들어 이윤을 창출하자니 출판자본의 품격이 문제가 된다. 해결책은 칙릿이 ‘나쁜’ 문학이 아니라 ‘좋은’ 문학이라 주장하면 된다. 이제 더 이상 유효성이니 인간성 옹호를 주장하는 작품 나부랭이는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문학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변해야 한다. 그 변화를 위한 최전선에 칙릿을 내세우자. 칙릿을 ‘좋은’ 문학으로 만들자. 그러기 위해 ‘문학상’을 제정하자.
 이 음험한 출판자본의 상업적 전략에 의해 그럴듯한 상품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 바로 칙릿이다. 칙릿을 쓰는 작가 역시 출판자본의 전략을 대환영한다. 이제 ‘나쁜’ 문학이 아니라 ‘좋은’ 문학을 하는 작가로 대접을 받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팔리지도 않는 ‘좋은’ 문학과는 달리 잘 팔린다. 높은 인세를 받고, 명예도 얻을 수 있기에 글을 쓰는 일은 즐겁다. 사회적 문제 따위에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오늘 우리사회에 만연한 가볍고 찰나적이고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들을 쉽고 재미있게 쓰면 된다.

                                         문학, 그 최후의 노래

  문학은 향기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런 세계를 지향하는 문학에는 아름답고 고귀한 향기가 넘쳐흐른다. 문학을 두고 ‘고독한 백조의 최후의 노래’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른 모든 것이 시대의 모순과 야합하더라도 문학만이, 홀로, 고독하게, 최후까지 남아, 그 모순이 극복된 세계로 나아갈 좌표를 제시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 노래는 적어도 ‘황금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의 본질이 변할 수 없는 이유가, 그리고 문학이 결코 ‘나쁜’ 작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혼을 팔아 프라다를 입는 악마’에게 ‘문학상’을 주는 나라. 그런 한심한 나라일수록 외곬으로 ‘좋은’ 작품을 쓰고 읽는 것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황홀한 향기가 여전하기에, ‘문학상’의 악취도 조만간 정화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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