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2.28 금 17:55
기획문화
21세기의 촛불, ‘상황주의자’의 부활인가이성혁 / 문학평론가
이주희 편집위원  |  loveshake1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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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호]
승인 2008.09.03  12: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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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내에서 일어난 최대 사건을 뽑으라면 촛불집회를 드는 이가 많을 것이다. 촛불집회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스펙터클 장치에 포섭되지 않은 다중의 구축적인 힘과 민주주의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에 따르면 스펙터클은 직접적으로 삶에 속했던 모든 것이 표상으로 물러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직접 파악할 수 없고 이미지들을 바라봄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는 세계다. 이 스펙터클의 자기운동에 적합한 수단은 매스미디어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뒷받침된 이명박의 CEO 이미지는 스펙터클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대중들은 그 이미지에 자신의 제헌권력을 양도했으며, 이는 대의민주주의가 스펙터클 장치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촛불, 스펙터클을 전복하다
반면 촛불들은 자신들을 대의해줄 단체를 원치 않았다. 매스미디어가 생산한 조작된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이에 자신들의 삶을 양도하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직접 미디어가 되고자 했다. 이 다중의 미디어들은 촛불들의 다양하고 발랄한 시위문화 및 전경의 진압현장을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전달했다. 이로써 촛불에 대해 폭력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했던 정권의 스펙터클적 기도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권의 기도와는 반대로, 전경이 맨손의 시민들을 몽둥이로 폭행하는 장면이 ‘시민기자들’에 의해 생생하게 촬영되어 인터넷을 통해 만인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일은, 이 시민기자들이 시청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과의 소통 속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온라인에 접속하여 현장을 전달받고 있는 시청자는 다른 상황도 파악하여 종합적인 정보를 다시 촬영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촬영자가 능동적으로 상황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촛불 미디어의 작동방식이 보여주듯이 뿌리줄기처럼 연결되고 확산되는 행동은 촛불들의 저항에 중심이 없기 때문에 가능했다. 촛불들은 집단지성을 통해 대항의 방향과 방법을 결정했다. 인터넷 카페가 연결점이 되어 투쟁을 연계하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권력층에 대한 저항을 실천했다. 이러한 자발성은 집회를 축제로 진화시켰다. 집회에 결합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발랄하게 발설했다. 지도부가 없으니 저항의 전술이 고안될리 없었다. 그래서 상황의 흐름은 예측불가능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의 무기는 패러디와 유머, 도주였다. 경찰의 폭력에도 촛불들은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웃음이야말로 폭력이 생산하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삶이 죽음에 승리하는 상황이 창출되었다.

상황주의자들의 기획을 넘어서
이렇게 보면 2008년 한국의 촛불은 스펙터클에 붙들려버린 삶을 탈환하기 위해 상황주의자들이 50년 전에 고안한 상황구축의 기획을 실현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957년, ‘이미지주의바우하우스’와 ‘문자주의자인터내셔널’이라는 아방가르드 조류들이 합류하여 결성된 상황주의자인터내셔널은 자신들의 중심 이념이 “생의 순간적 환경을 구체적으로 구축하기, 그리고 그것들을 보다 고차원의 정동적인 질을 갖춘 것으로 변형시키기”라고 밝힌 바 있다. 정동적인 질이 상승하는 순간이란 삶이 고양되는 순간을 말한다. 유머가 가득한 촛불집회의 축제적인 현장은, 바로 삶의 고양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구축된 순간이 아니겠는가. 
   

상황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스펙터클의 포섭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를 위한 기술로 상황주의자들은 표류(deive)와 전용(deournement)을 발견했다. 표류는 그야말로 도시 속을 돌아다니는 기술이다. 표류를 통해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감정이 생기며 스펙터클의 도시에 잠재되어 있는 상황구축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표류는 스펙터클로 변모한 도시공간의 재전유다. 상황주의자들의 정의에 의하면, 전용은 “현재 혹은 과거에 만들어진 예술을 보다 고도의 구축된 환경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프로파간다의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전용은 상황구축을 위해 행해지는 선동에 사용되는 기술로서 일종의 패러디다. 넓게 보면,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미디어를 스펙터클의 파괴에 이용하는 것 역시 전용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촛불들은 상황주의자들이 의식적으로 고안한 기술들인 표류와 전용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다. 대중영화를 전용하여 이명박 정부를 비꼬거나 보수신문의 기사를 전용하여 그 신문의 이중성을 역공격하기도 했다. 권력의 담론들은 전용되어 권력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촛불들은 전경의 폭력으로부터 도주하며 진행되는 게릴라 집회를 통해 전경을 진 빠지게 하는 상황을 창출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공간은 촛불 시위자들의 육체와 호응하게 된다. 이 역시 도시공간을 재전유한다는 측면에서 상황주의자들의 표류와 통한다.
하지만 한국의 촛불과 상황주의자들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다. 상황주의자들은 ‘마지막 아방가르드’로서 상황에 전위적으로 개입하여 ‘고차원의 정동적 상황’을 구축하고자 했던 데 비해, 한국의 촛불들은 대중/전위의 틀을 뛰어넘어 상황구축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었던 것이다. 촛불이 변이하면서 상황은 변이되고, 상황이 변이되면 촛불도 변이된다. 촛불은 대중이 아방가르드가 되는, 아방가르드 이후의 아방가르드다. 상황주의자들은 “시적 객체 안에서 시적 주체의 유희를 조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객체(상황)와 주체가 구별되지 않는 촛불은 시 자체다. “시는 창조적 자발성의 조직”이라는 상황주의자 라울 바네겜의 말에 따르면 말이다. 촛불을 과장하지 말라고, 또는 촛불이 약화되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시는 잠재성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약화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시 자체인 촛불은 언제 어디서 집단적으로 분출될지 모르는 일이다. 바네겜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시는 항상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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