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 영어영문학과 교수


누구나 어린 시절 처음으로 극장에 갔을 때의 경이로움을 잊지 못할 것이다. 큰 화면위로 펼쳐지는 스펙터클 영상도 충격이지만, 천둥소리를 방불케 하는 사운드의 위력 또한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기 때문이다. 컴컴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빛의 마술에 이끌려서 우리는 꼼짝없이 판타지의 세계에 사로잡혀 버린다. 그 판타지의 세계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유리창이 되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를 되비추어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극장공간을 플라톤의 동굴에 비유하기도 한다. 태양을 직접 응시할 수 없는 철인이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태양의 존재를 감지하듯이, 관객이 스크린에 투사된 상상계의 환영을 통해 현실의 의미를 추적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스크린을 인간의 뇌에 비유하여 이미지가 시간에 대한 사유기제로서 구현되는 공간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반 영화는 인문학의 영역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아니, 반대로 인문학이 영화로 다가갔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유학시절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 개념을 정리하기 위하여 시작했던 공부가 베르그송, 후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하이데거 등의 현상학자들이 쓴 글들을 거쳐 데리다를 포함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시간 개념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책이 질 들뢰즈가 쓴 두 권의 영화론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쏟아져 나왔던 <로스트 하이웨이>나 <메멘토>, 혹은 <펄프픽션>과 같이 서사가 뒤틀린 영화들은 여태껏 재미로만 보았던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뒤바꿔놓기에 충분했다. 1920년대 에이젠슈타인을 비롯한 소비에트 감독들이 주창한 몽타주 이론이 당대의 엘리엇과 같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태인 대학살을 주제로 다룬 클로드 란츠만의 다큐멘터리 <쇼아>를 보면서 기억이 현재와 만나는 방식에 대한 매우 충격적인 경험도 하게 되었다. 한국계 다큐멘터리 감독 크리스틴 초이가 만든 <남경 대학살>에서 학살에 참여했던 일본군 병사들의 인터뷰는 벤야민이 언급하였던 “10분의 1초의 다이너마이트”보다도 더 강력한 이미지의 힘을 보여준다. 문학과 철학의 프레임 속에서 영화를 만나는 것은 이처럼 사유의 복합성과 애매성에 대한 성찰을 동반한다. 무척 따분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이 만남이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것이란 점은 새삼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극장의 어두움 속에 몸을 묻은 채 상상계의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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