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 /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박사 수료·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최근 광우병 정국과 관련해 대중들의 자발적인 촛불시위가 연이어 진행되면서, ‘대중정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이론적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이에 68혁명의 정치적 함의를 되새기면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정치’의 공간을 재구축하고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전망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통상적인 인식과 달리 프랑스에서 68년 혁명의 주체는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였다. 우선 학생들이 운동을 선도했고 이를 통해 열려진 정치적 공간에서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전개했으며, 이 두 번째 국면에서 체제의 위기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제도정치와 대중정치의 분할
파리 근교 빈민가에 졸속으로 만들어진 낭테르대학(소르본대학의 분교)의 학생들이 1968년 3월 22일 반베트남전쟁과 교육개혁을 요구하며 대학본부를 점거한 사건은 여러 학생운동 세력들―트로츠키적인 혁명적공산주의청년회(JCR), 마오주의적인 맑스레닌주의공산주의청년연합(UJC-ml), 아나키즘적인 상황주의자(SI), 공산당 하부기관인 공산주의학생연합(UEC) 등―이 연대활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3월 22일 운동’은 그해 5월 혁명 내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의 열띤 분위기는 1967년 10월 혁명운동의 대중적 상징이던 체 게바라가 총살되고 1968년 1월 30일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구정공세(Tet Offensive)가 성공하면서 절정에 이른 상태였고, 여기에 프랑스의 전통적인 낡은 교과과정과 강압적인 학칙이 학생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5월 11~12일 학생들 중심의 ‘바리케이드의 밤’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총파업이 68년 혁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5월 15일 르노 자동차공장의 파업과 점거는 전국적인 파업 물결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5월 23일에 이르러 전국 파업은 1천만 명을 넘어섰고 곳곳에서 자율행동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전국의 파업 물결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적 정세가 아니라고 판단한 프랑스공산당(PCF)은 상황을 지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학생들의 극좌 경향과 노동자들의 과도한 요구를 비난할 뿐 어떤 유효한 행동도 전개하지 못했다. 더구나 5월 27일 노동총동맹(CGT)이 정부 및 고용주와 3자 협상을 진행해 타결시킨 그르넬협정(Les accords de Grenelle)을 현장노동자들이 거부하고 지도부를 규탄하면서 혁명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마침내 5월 29일 드골 대통령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지배세력이 정권을 포기했다는 의미로 이해되었고 승리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드골은 독일의 바덴바덴에 있는 프랑스 군기지에서 장군들과 비밀 협상을 벌여 만일의 경우 군대를 진격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5월 30일 대국민연설에서 공산독재에 맞서기 위한 무력진압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국민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선거 국면을 조성해 불리한 상황을 만회하려는 드골의 영악한 술책은 효과를 발휘했다. 선거에서 승리할 것을 자신한 공산당과 노동총동맹은 파업 중지를 호소하고 작업장 복귀를 설득했으며, 드골정권은 실탄까지 사용할 정도로 물리적 탄압을 강화하여 공장파업위원회를 진압하고 점거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정부 및 고용주에게 양보를 얻어낸 그르넬협정을 수용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6월 13일 여러 좌파 학생조직들마저 불법화되고 소르본대학을 점거한 학생들까지 강제 해산되면서 5월 혁명은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공산당과 노동총동맹의 예상과 달리 6월 23일과 30일 총선에서 압승한 것은 드골파인 공화국민주연합(UDR)이었다. 오히려 공산당과 사회당은 기존 의석을 크게 상실했다. 국민 영웅 드골의 카리스마가 다시 한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68년 5월 혁명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공산당이나 노동총동맹으로 대표되는 제도정치와 학생 및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전개한 대중정치의 단절과 분할이었다. 제도정치가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전통적인 운동모델에 입각해 있었다면, 대중정치에서는 노동자 자주관리를 중심으로 일상의 주체적 삶을 가로막는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과 소비문화 등에 대한 비판이 저변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투쟁 형태에서도 중앙지도부의 지휘를 따르는 규격화된 집회와 시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쌓거나 대학과 공장을 점거하는 점거투쟁이 중심에 있었으며, 이런 점거공간에서 자율적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문화적 반란을 실험했다. 이런 의미에서 68년 혁명은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정치투쟁을 중심에 두는 중앙집중화된 운동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세계를 변혁한다는 기존의 2단계 반체제운동 모델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
따라서 68년 혁명 이후 기존의 운동모델로 흡수될 수 없는 새로운 사회운동들이 부상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특히 68년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현실에 안주해버린 노동계급을 혁명주체로 특권화하는 데 반대하고 위계적인 운동질서를 비판하면서, 반문화 내지 하위문화를 발전시키는 ‘문화적 반란’을 계승하고자 했다. 또한 이탈리아·독일·북서유럽에서는 자율주의 운동이 핵 발전소 및 폐기장에 반대하는 반핵운동을 전개하고, 빈집과 건물을 무단 점거하는 청년 크라커들(Krrakers)이 공동체를 구성하여 새로운 일상문화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사회운동들은 1980년대 이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반격 속에서 본래의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제도정치에 흡수되거나, 장기적인 운동을 담보할 대항헤게모니와 조직 구성에 실패하여 서서히 자본주의 질서에 잠식당했다.

대중정치가 제기한 쟁점들
68년 혁명을 계기로 제도정치와 대중정치의 분할이 가속화되었고, 새로운 대중정치의 실험들이 얼마간 지속되었지만, 기존의 제도정치 못지않게 대중정치 또한 점차 자신의 동력과 활력을 잃어버렸다. 이런 실천적 과정은 이론적 쟁점들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애초 이론적 쟁점은 노동운동이 변혁적 위상을 상실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만 추구하는 조합주의적 운동으로 전락했다는 데 있었으며, 그에 따라 노동운동을 중심에 두고 사회 변혁을 사고하는 이론적·실천적 모델에 대한 비판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로 인해 노동 이외의 인간 활동을 중시하는 윤리학, 생산이 아닌 이데올로기·문화·정체성의 전환을 강조하는 변혁론, 노동계급이 아니라 인민이나 다중, 소수자 등을 내세우는 운동주체론 등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또한 조직형태의 측면에서도 기존의 일국적인 정당-노동조합 연합모델이 아니라, 그런 제도정치로 포괄되지 않는 소수자들의 네트워크 조직이나 일국적인 한계를 벗어나려는 각종 비정구부기구들, 아니면 아예 거대 조직을 지향하지 않는 개인주의적인 소규모 집단들의 연대가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제도정치와 단절된 대중정치의 실험들이 전체적으로 실패하거나 소기의 성과를 확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되는 가운데, 이상의 이론적 쟁점들에 대한 재성찰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이는 물론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공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지난 20여 년의 운동과정에 대한 반성과도 결부되어 있다. 그에 따라 제도정치와 대중정치(또는 정당-노동조합운동과 사회운동, 당좌파와 사회적 좌파 등)의 새로운 연대가 주요 과제로 다시 제기되고 있으며, 국가와 관련해서도 국가권력의 장악 모델은 폐기할지라도 국가의 변혁 내지 개혁을 포기하는 것이 대안은 아니라는 재반론, 문화의 변혁을 강조하는 가운데 자본의 변혁이란 과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재비판, 노동계급의 탈혁명화를 비판할지라도 그만큼 강력한 혁명 주체를 새롭게 발견·구성하지 못했다는 문제제기 등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이론적 쟁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68년 혁명에 버금가는 새로운 대중운동의 등장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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