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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드라: 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 마커스 레디커·피터 라인보우 / 손지태·정남영 옮김(갈무리/2008)
“선원들은 키의 조종과 관련해서 서로 다툰다네. 저마다 자기가 키를 조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지. 아무도 일찍이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을 내세우지도 못하며, 자신이 그걸 습득한 시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말일세. 게다가 이들은 그 기술이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누군가가 그걸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그를 박살낼 태세가 되어 있다네.” (플라톤, <국가>)
서구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할 만한 플라톤은 이런 ‘선원의 비유’를 통해 일찍부터 민주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린 바 있다. 민주주의란 요동치는 물결과 거친 선원들이라는 이중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은 미친 짓이라고. 그리하여 도시국가는 짭짤한 바다 냄새나 술과 땀에 찌든 선원의 냄새가 너무 가까이에 있는 항구, 혹은 민주주의의 냄새가 나는 바다에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어져야 할 것이었다.
<히드라: 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은 무려 기원전 4~5세기부터 뱃사람들에게 덧씌워진 이 낙인의 의미를 뒤집으면서 시작한다. 그렇다. 바다에서는 민주주의의 냄새가 난다. 뱃사람들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의한 맑스의 말에 정확히 들어맞는 최초의 인물들이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바다로, 뱃사람들의 해양적 기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영국의 걸출한 좌파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슨(1924~1993)의 제자인 피터 라인보우(1942~)와의 협력 아래 대서양사 / 해양사 전문가인 마커스 레디커(1951~)가 복원해낸 이 놀라운 뱃사람들의 형상은 1609년경부터 1820년경까지 인클로저로 자기가 살던 공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 추방된 떠돌이들과 중범죄자들, 흑백의 하인들과 노예들, 종교적 급진주의자들, 탈영하거나 복종을 거부한 병사들의 형상과 합쳐져 다두(多頭) 괴물 히드라가 된다. 지배자들의 헤라클레스 신화에 맞선 피지배자들의 히드라 신화 속 주인공은 이렇게 등장한다.
레디커와 라인보우에 따르면, 이 히드라들의 기획은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설립한 ‘버지니아회사’ 소속의 씨벤처호 선원들(그리고 그 승객들)이 1609년 7월 28일 허리케인으로 파선되어 버뮤다 섬에 오르게 된 사건을 통해 그 윤곽을 볼 수 있다. 일찍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폭풍>을 쓸 때 참조했던 그 사건, 자신의 관객들을 위한 꿈과 같은 한바탕 연극을 위해 그 투쟁의 진실을 가려버린 사건을 통해 씨벤처호의 선원들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버뮤다 섬에서 자신들이 꿈꿨던 세상을 봤다. 노역, 사유재산, (율)법, 중재, 재판관,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없는 사회, 무엇보다 속박이 종결되고 땅을 박탈당한 자에게 공유지가 되돌아갈 것이라는 약속이 실현된 사회를. 그래서 이들은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해 “공동으로 하기(commoning)에 관한 살아 있는 기억”에 기댔다. 무엇보다도 ‘공동으로 하기’는 거친 파도와 조류, 폭풍 등을 헤쳐 배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항시키는 선원들에게는 피부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들의 직접적인 후예들이라 할 만한 17세기 말의 뱃사람들은 자신들의 해양국가, 즉 ‘히드라국’(hydrarchy)을 “비민주적인 시대에 가장 민주적”인 곳으로 만듦으로써 이들의 기획을 이어갔다. 민주적으로 동의된 규율, 정의의 분배, 권위의 제한, 다문화적·다인종적·다민족적 질서 등등. 여기에서도 ‘공동으로 하기’는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톤에 맞서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선원들의 땀은 이윤을 좇는 소유욕에 불타는 육체의 수액이 아니라 협력하는 노동의 수액이며, 그들의 술은 향락이 아니라 축제를 위한 것이라고. 요컨대 플라톤이 말한 짭짤한 바다의 냄새, 민주주의의 냄새는 고약하기보다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레디커와 라인보우는 “혁명적 대서양의 감춰진 역사”(<히드라>의 원래 부제)를 통해, 대서양자본주의의 성공으로 봉건제를 날려버리는 데 성공한 부르주아적 헤라클레스(당대의 지배계급)의 입장에 서서 보자면 감춰진 것은 그들의 과업이 낳은 핏빛 역사일 뿐이지만, 이에 맞선 민주주의적 히드라들(소위 ‘잡색 군중’)의 입장에 서서 보자면 감춰진 것은 아예 이들의 존재 자체라는 점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후예들은 정치를 구하려면 그것을 바다가 아니라 목자들의 ‘땅’으로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디커와 라인보우가 복원해낸 역사적 히드라들, 즉 장작 패고 물 긷는 사람들, 프랜시스라는 이름의 검둥이 하녀, 아메리카 혁명기의 잡색 부대 등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데 필요한 것은 땅의 꽉 막힘이 아니라 바다의 광활함임을, 사슬에 묶인 노역이 아니라 노 젓는 협력임을, 벽에 비친 탁한 그림자가 아니라 파도 위에 반사되는 찬란한 빛임을 기억하게 만든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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