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운택 /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올해는 유럽에서 소위 68혁명이 발생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갈린다.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당시의 핵심 구호처럼 68혁명이 서유럽 사회 전반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이행의 중요한 계기였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 1970년대에 68혁명을 이끌었던 각종 운동조직과 단체가 해산되고, ‘적을 깨트릴 수 없다면 차라리 그들 속으로 들어가라’라는 자조적인 변명 아래 68혁명 세대의 일부가 그들이 비난하던 권위적인 현실정치와 타협해 현란한 정치적·사회적 경력을 쌓아갔던 점을 들어 68혁명에 낙인을 찍는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후자의 평가는 이미 사회주의 붕괴 이후 ‘좌파진영’의 박멸을 위해 우파진영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논리이기도 해서 사실 새롭지는 않다. 오히려 68세대가 그 중심에 섰던 서유럽에서의 사민주의 정권의 등장이 차라리 그런 비난을 잠시나마 잠재웠던 에피소드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가 이념적 지표에 따라 마냥 너그러울 수만은 없기에, 모든 운동은 그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있어야만 하며, 나아가서 역사의 교훈 또한 있기 마련이다. 68운동이 여전히 혁명적 가치를 지닌다면 오늘날 우리 현실에는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 그러한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비교가 필수적이다.

주지하다시피 68운동은 ‘민주주의, 인권, 해방 그리고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건 ‘구좌파’에 의한 노동운동 및 사회주의 정당운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사회적 맥락과 정치적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운동의 주체도 상이하다. 68혁명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경험은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68운동은 소위 서유럽이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구축하면서 등장한 천박한 물질주의, 진부하고 퇴색한 부르주아 문화와 같은 사회적 맥락과 국내에서 점차 강화되었던 정치적 권위주의(특히 독일과 프랑스), 미국의 베트남 침공 및 중국, 베트남, 쿠바 등에서의 일련의 혁명이라는 국제정치적 변화를 그 배경으로 한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민주적으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열망이 대대적인 학생운동에 의해서 촉발되었으며, 여기에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이 결합함으로써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학생운동은 조직적 차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발전하여 특히 독일의 경우 대학을 중심으로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 이하 SDS)이 결성되어 68운동의 목표와 방향, 나아가 정치적 노선의 결정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형식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발전과정은 1980년대 한국에서 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일견 유사한 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SDS)의 성과와 한계
이하에서는 독일 SDS 조직의 입장과 정치적 노선을 중심으로 그 공과를 분석해봄으로써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대학사회에 던져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SDS는 당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고 독일의 정치적 권위주의에 항거하던 대학생 베노 오네조크의 죽음에 저항하던 학생들의 조직화·대중화에 기여하였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진부하고 악취나는 부르주아적 문화와 제도를 타파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그 노선을 설정하였다. 둘째, SDS는 학생운동의 실천에서 운동적 행위와 계몽을 항상 접목시켜왔다. 사회적 이슈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대규모 토론회가 동반되었으며, 다양한 독서모임, 써클 등을 조직화하여 보수적인 언론매체에 대한 대안적 공론장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1968년 독일의 저명한 주간지 <슈피겔>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독일 청소년의 67%가 대학생의 데모에 찬성하였으며, 27%는 심지어 당시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루디 두치케의 이념에 적극 동의하였다.
셋째, SDS는 학생들이 정치적 변화의 주체임을 인지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이해와 주장을 대학 외부의 운동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관철시키려 하였다. 예컨대, 1968년 이전 독일의 대학은 대단히 보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장소였다. SDS는 노동자 자녀들에게 대학을 개방하고, 무상교육을 통한 교육확대를 주장하고, 실제로 그러한 주장의 관철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넷째, SDS는 포괄적인 사회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자본주의 비판에 교조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창조적인 좌파 지식인들의 공동체로 기능하였다. SDS는 아데나워의 반공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였으나 현실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한편 1959년 고데스부르크 강령을 통해 노동자정당으로부터 국민정당으로 전환한 독일 사민당에 대한 비판은 결국 SDS 소속의 사민당원들이 대거 출당조치당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다양한 이론적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는데,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고전맑스주의 이론으로부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및 반제국주의적 해방운동이론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했다. 나아가서 격렬한 논쟁은 루카치, 마르쿠제, 그람시, 초기 맑스의 저작의 재발견으로 이어져 SDS 내부에서 형성된 좌파이론의 다원주의 구조는 사회주의적 지성의 공동체 구축에 이바지하였다.

다섯째, SDS에 의해 저항의 수단으로 채택된 비타협적인 논쟁문화는 대학과 사회에서 보수적 헤게모니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는 단순한 논쟁의 차원을 넘어서 대안적 삶의 형태를 제안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여섯째, SDS는 끊임없이 지식인과 노동자의 연대를 추구하였다. 특히 독일에서는 젊은 학생지식인들과 조직화된 노동자운동의 좌파진영과의 연대가 구축되어(특히 금속노조)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비판적 지성과 대중사회와의 소통이 끊임없이 시도되었고, 대학은 모호한 세계에서 안개를 걷어내기 위한 중요한 교육장소로 이용되었다.
독일 학생운동은 이와 같은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1970년에 해체의 수순을 밟았듯 조직활동의 약점도 드러내보였다. 무엇보다 SDS는 대단히 남성중심적인 조직구조를 유지하였으며, 심지어 다수의 SDS남성은 여성들에게 권위적이기까지 하여 1968년 하반기에는 여성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과 의장단에 대한 토마토 투척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한편,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SDS활동의 강점이었으나 실천적 행위는 언제나 사회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특히 1968년 대세를 이루었던 ‘서구 자본주의 사회 = 후기자본주의’라는 테제는 실천적 한계를 드러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과 자정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저질렀다.

                                  대학의 비판적 이성 깨어나야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대단히 권위적으로 반민주적인 양태를 띠면서 관철되고 있다. 최근 소고기 파동과 일련의 FTA현안, 그리고 각종 대학의 구조조정  작업에서도 보이듯 자본주의의 개혁과정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나마 거두어들였던 민주주의적 성과마저 위협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68년 학생운동의 조직화와 각종 사회운동과의 결합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물론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이 그 소임을 맡았듯 그러한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전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운동의 지성화와 대중과의 지속적인 결합, 대안적 삶의 형태를 그려내는 데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였다. 68운동이 보여준 비판적 지성의 역할과 대안적 문화의 창출은 여전히 우리 지성에게도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올해 1월 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68운동 40주년에 즈음하여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SDS의 건강한 유산을 물려받고 비판적 지성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신좌파대학연합’을 발족하였고, 지난 5월 4일부터 6일까지 발대식을 기념하는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우리 대학의 지성도 건강한 비판적 이성의 힘으로 깨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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