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 무용평론가

한국 무용계가 사회와 소통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지난해 병역특례 축소 문제나 김주원 누드 소동 정도가 그나마 무용계의 존재를 알렸을 뿐이다. 그것도 긍정적인 방식인가 하는 것은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병역특례 축소 문제는 지금 잠복기를 거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무용계는 한 목소리로 현상유지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의외로 궁색하다. 국제 무용콩쿠르 입상자로 병역면제 대상자를 제한한다는 방침에 대해 사대주의라고 비판한 것은 다른 장르나 영역에서는 어떻게 규정되었는지를 살피지 않은 것이었다.
젊은 무용수들의 활동을 제한하여 궁극적으로 한국 무용계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논리도 있다. 그렇다면 병역특례가 있는 동안 한국 무용계가 발전했다는 소리인가. 무용인이라면 자성과 변화를 다짐해야 할 만큼 무용계의 춤은 사회적 공명을 낳지 못했다. 그런 터수에 병역특례와 무용 창작의 함수관계가 있다는 강변은 곤란하다. 물론 특수한 예도 거론된다. 직업적 연한이 짧고, 섬세한 무용-근육을 사용하는 발레 무용수들의 경우는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현재 발레계의 사정을 살펴본다면 진리는 아니다.

재현주의에 얽매인 한국 무용계
최근 국립발레단(예술감독 최태지)은 발레의 기운 진작을 위해 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택했다. 유리가 누구인가. 구소련 시절 러시아 발레의 전성기를 이끌던 장본인이며, 1960년대 <스파르타쿠스>, <호두까기 인형>을 안무한 거장이다. 그렇기는 하나 이제 그는 자기 시대를 상실했다. 왜냐하면 클래식 발레라는 춤의 습속은 기량에 대한 물신주의, 형식과 체계에 얽매인 고전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발레는 컨템퍼러리 발레로서,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생활세계의 정감을 표현하고 우연과 미지의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법 자체가 완연히 다르다.
한국의 발레는 여전히 무용수의 기량에 의지하는 재현주의에 기울어 있다. 반면 컨템퍼러리 발레는 “바보야, 문제는 창작이야!”라고 외치면서 안무에 몰입하고 있다. 테크닉이냐 독창성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물론 한국의 관객들은 클래식 발레로도 만족하면서 그 스펙터클한 효과, 뛰어난 신체의 감상, 클래식 기량의 향수에 젖어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동시대의 예술이 아니다. 감각적으로도 시각적 호소이지, 촉각적 전이가 아니다.
고로 병역특례와 관련하여 발레계가 무용수 확보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셈이다. 아마 국립발레단은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과 더불어 “아직은 창작을 운운할 단계가 아니다”라는 준비론자의 논리를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룩셈부르크가 말한 것처럼 “모든 혁명은 시기상조이다.” 결국 무용수의 트레이닝과 관련한 교육이 춤의 대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한국 무용계의 현주소이며, 안무는 지극히 좁게 해석하여 춤의 동작을 고안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이 한국 무용계가 춤으로 사회적 공명을 당당하게 낳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창작 없는 예술’이라는 언어도단이 한국 무용계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 전통춤의 체계에서 몇발짝 나아가지 못한 춤, 발레의 낡은 클래식을 반복하고 있는 춤 등등이 창작의 너울을 뒤집어쓰고 무대를 점유하고 있다. 현대무용조차도 미국의 모던 댄스를 수입하고 고착화시켜 혁신을 꾀하기가 힘들다. 정작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로 춤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지금은 ‘뜨거운 장면’을 만들기가 힘든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이 모든 원인이 춤만의 ‘무브먼트-물신주의’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은 미국의 포스트모던 댄스를 받아들이면서도 신체를 둘러싼 생명정치, 미디어와의 재매개, 다원적인 장르 통합 등등 사회적 공명을 꾀해 왔다. 무엇보다 신체가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힘과 힘이 부딪히는 현실에 있는 것이며, 그 현실적인 것들을 무대로 출몰시켜야 한다는 컨템퍼러리 감각이 발동되었다. 이것이 대서양 양안을 날카롭게 갈랐으며, 더 이상 영미 계통의 모던 댄스가 유럽에 통하여 흐를 수 없는 바탕이 되었다.

새로운 춤의 혁명가를 고대한다
우리의 경우는 김주원 누드 소동이 말해주듯, 지극히 촌스러운 감성으로 덧칠되어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영미 쪽의 습속을 받아들여 ‘무브먼트-물신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그보다 한술 더 떠서 ‘벗은 몸’에 대한 보수적 태도가 여전히 엄존해 있다. 이러니 젊은 무용가들의 표현적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병역특례 제도의 의사결정이 결국 교수-커넥션을 통해 이루어지다보니, ‘교수 권력의 비대화’에 따른 순응주의와 줄세우기 문화가 만연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무의 초인을 기다린다. 아르토의 ‘현시 혁명’이 도화선이 되어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히지카타 타츠미의 암흑부토, 그리고 벨기에의 뛰어난 안무가가 나온 것처럼 새로운 춤의 혁명가를 학수고대한다. 그 이유는 거꾸로 지금처럼 다른 장르나 영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낙후된 무용계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를 돌연변이시키는 안무나 뜻밖의 백치학(idiotology)의 실천은 그러한 현실에서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무대에 나타난 신체는 때때로 괴이하며, 그 낯선 신체가 괴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신체는 21세기 예술의 마지막 대지이며, 미디어의 탈물질화 경향이 가속될수록 물질적 신체의 리듬과 공명은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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