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 / 문학평론가

■ 담론의 최전선 : <마르크스주의연구> 학진등재후보지 선정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원장 장상환)이 펴내는 전문 학술지 <마르크스주의연구>가 지난해 12월 28일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의 등재후보지로 공식 선정됐다. <마르크스주의연구>가 학진의 재정 지원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특화 고급 전문학술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있는가 하면, 좌파 학술지가 국가적 지원을 받는 것의 의미와 정당성, 향후 여파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연구>의 등재후보지 선정 소식을 바라보는 상반된 관점을 비교해 본다. <편집자주>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마르크스주의연구>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분류하는 등재후보지로 선정되었다. 이 미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현실론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반길 일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한국에서 맑스주의에 입각해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스스로를 학문적 ‘비주류’ 또는 ‘소수자’의 처지에 빠뜨리는 일이다. 1980년대에 일시적으로 맑스주의가 대학의 ‘진입장벽’을 넘었지만, 이조차 매우 이례적인 것이어서, 1990년대 이후 맑스주의를 연구하는 일은 제도 바깥에서의 고독을 자처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90년대 이후 맑스주의에 입각해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이 대학사회에 진입한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술지 <마르크스주의연구>가 학진에 의해 ‘공인’되었다는 것은, 해당전공 연구자들의 학술적 인프라를 확장하고, 제도학계로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으로 이 사태를 생각해 보면, 이는 바야흐로 한국의 맑스주의 연구가 완벽하게 ‘살롱 맑스주의’로 안착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나는 ‘강단 맑스주의’와 ‘현장 맑스주의’를 적대적으로 분류하면서, 특히 강단 맑스주의를 싸잡아 비판하는 일이 결코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강단으로 간 맑스주의가 자본과 국가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은 고사하고, ‘학진’으로 상징되는 제도관리 시스템의 ‘인증’과 ‘분류체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역시 비판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학문의 국가종속에 대한 근본적 비판 필요

나는 학진이 추구하는 ‘등재지’ 시스템이 학문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학자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경쟁과 물량주의에 입각한 ‘과다 업적주의’를 추종하게 함으로써, 시스템에 대한 맹신과 체제에의 순응을 구조화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했다고 생각한다. 학자의 연구업적에 대한 평가는 학문공동체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제도 학계는 이 기능을 학진이라는 준(準)국가기구에 이양한 후, 학진의 제도관리 시스템에 편승하거나 방관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나 자신이 맑스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맑스가 그의 저작과 실천을 통해서 보여준 사상의 기본태도는 제도적으로 강제되거나 당연시되고 있는 사회적 ‘분류체계’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이를 현실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그것이 맑스주의의 기본정신이라고 한다면, 자본제로 상징되는 거대한 구조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오늘날 학문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학계의 ‘제도관리 메커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수행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의 연구자들이 취해야 할 비판의 첫 번째 단계는 ‘학술지 등재 시스템’으로 상징되는 학진의 ‘분류체계’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업적평가 방식의 새로운 재구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학진을 해체시키자는 과격한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학진은 지원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을 재조정하고, 학문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학문공동체 내부에서 분과학문별로 그 평가의 방식과 원칙을 재규정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현행의 ‘등재지 시스템’을 통한 학문의 국가종속과 연구자의 순응메커니즘은 근본적으로 혁파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구축이 궁극적으로 학계에 초래한 현상은 생동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과는 무관한 ‘논문중심주의’의 강화에 불과했고, 그것은 대학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타는 혀’에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귀착되었기 때문이다. 맑스가 다시 돌아온다면, 이러한 현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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