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권력에 대항하는 자매애

상담소에서 접하는 상담 중에는 본인이 아닌 대리인이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 남자 친구가 자기 여자 친구의 피해를, 혹은 남편이 자기 아내의 성폭력 피해를 상담할 때는 상당히 난감한 경우가 많다. “내 여자친구·아내를 건드린 그 자식을 죽여버리겠다”라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는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그런 일을 당하냐”라는 피해자에 대한 분노로 쉽게 옮겨가곤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사건의 해결자인 것처럼 나서서 고소를 권하거나 합의를 이끄는 과정에서 여자친구나 부인과의 관계는 좋아지기보다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혹은 가해자를 다짜고짜 때려 눕혀 폭력으로 쌍방 고소되어 오히려 상황을 망쳐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여자친구는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원하는지’가 쉽게 잊혀진다. 피해자는 오히려 ‘나 때문에 (나보다) 더 힘들어진 남자친구·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게 도대체 어떤 상황인가.

이 남성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일말의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 생생한 분노는 아마도 자존심의 상처인 듯하다. 자신의 애인, 혹은 부인에게 성폭력 가해를 했다는 것이 곧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여성주의 정치학자 캐럴 페이트만은 근대 시민사회의 사회 계약을 ‘성적 계약’이 전제된 남성 동맹의 형태라고 지적한다. 성적 계약으로서의 근대적 계약이란 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권리 일체를 한 남성에게 양도한 대가로, 그 남성은 다른 남성에게 속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남성사회 동맹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자신의 여자친구나 부인의 피해에 대해 분노하고 모욕을 느끼는 남성들의 불편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때 성폭력 사건은 여성의 피해가 아니라 남성들 사이의 문제로 넘어가 버린다. 이 남자들에게 “왜 그렇게 분노하세요?”라고 질문하면 열명 중에서 아홉명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데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그녀에 대해 분노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고 폭력을 사용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거침없이 여자들의 뺨을 갈기며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는 말이 용납되는 것은 바로 그 사랑과 폭력과 분노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남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 역시 이 폭력적인 에너지를 ‘사랑’한다.

여기서 여성들은 어떠한가. 여성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탁할 수 있는 훌륭한 남성을 찾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사회적 관계 맺기는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남성을 통해 이루어지고 여성들은 더 안정적인 삶을 위해 ‘조건’을 건다. 이 때 여성들 사이에서 허락되는 감정은 경쟁이나 질투 혹은 무관심이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다른 여성을 보면서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생 망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피해를 입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할지’를 환기시켜주는 기회가 될 뿐이다.

‘연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반성폭력운동

바로 이 부분에 개입하는 것이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활동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여성들이 바로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는 곳이다. 기존에도 성폭력은 범죄였다. 형법상 성폭력은 범죄였지만 그것은 정조 침해의 죄로서, 남성 재산권 침해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남성 가문의 명예를 위해 지켜져야 할 것이지만, 다른 남성이 그것을 훼손한 것에 대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의 성폭력 범죄 처벌 의지는 성적 계약을 파기한 남성들에 대한 처벌 의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 사이의 공통성을 강조하며 ‘연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반성폭력운동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위계화하며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 낙인을 찍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반란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소위 자매애라는 이름의 여성 연대이다. 성폭력 피해를 통해 남성과의 관계에서 위계화되는 존재에 불과하던 여성이 그 위계화 체계를 비웃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로 4회를 맞고 있는 <밤길 되찾기 시위>는 ‘밤길에서 여성들을 위협하는 가해자’ 뿐만 아니라 ‘늦은 밤길이 걱정된다는 바로 너’에게 경고한다. ‘밤길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너, 그런 네가 더 위험해’라고 말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위계화하고 ‘순결한 여성’이 되어 결혼 시장에서 자기 몸값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는 여성들을 통제하려는 공포정치’이고 ‘순결한 여성이 아름답다’는 이데올로기는 그 공포정치의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외치는 여성들에게 있어 성폭력은 더 이상 여성들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한 ‘삶’의 문제가 되고, 무기력함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강요했던 ‘분노’의 문제가 된다.

올해로 5회 째를 맞고 있는 <성폭력 생존자말하기 대회> 역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부장적 편견과 제도에게 자신을 변명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이리오너라, 씹고놀자’라고 낄낄댄다.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 통념에 의해 자신을 가부장적 질서에 위계화시키지 않겠다는 ‘연대’의 정신이 전제된 것이다. ‘짧은 치마를 입은 자신을, 늦게까지 술을 먹은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괜찮아, 나도 그랬어’(1회 말하기 대회의 유명한 말)라는 말이 있는 제의적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들을 위계화시키겠다는, 바로 ‘너희들’을 물먹이는 공간 말이다.

연대는 늘 위태위태하고 어려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성폭력 이슈는 쉽게 남성 동맹의 갈등을 드러내는 식으로 이슈화되고,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혐오는 가해 남성 뿐 아니라 피해 여성에게도 뿌리 깊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역고소 등 반성폭력운동에 대한 백래쉬와 보수화가 한창인 지금, 여성들의 ‘연대’라는 말은 그 급진적 의미로 다시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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