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와 문화

김성태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

많은 사람들이 영화 기호학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거기서 얻은 지식들을 동원해 애써 그것을 규정해보려 한다. 하지만 영화 기호학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냉정한 실체가 있는 반면, 어떤 면에서는 모호하고 분석의 틀로써 합당치 못한 면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영화 기호학자 메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화 언어에 대한 기호학의 개념들/체계의 불분명한 전이, 모호하고 불충분한 일반화, 지나친 때로는 궁색한 차용 등을 이유로 들어서. 물론, 공격에 나선 이들은 그래도 그나마 낫다. 다른 범주에서 슬쩍 영화 기호학에 대한 강의로 뛰어든 사람들은 그들의 기호학/언어학의 지식에 기대어 메츠가 범한 오류의 지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명할 것들이 무수히 남아 있는 언표들을 적당한 선에서 매듭짓곤 한다. 문제는 공격에 있다. 메츠는 리용 대학 세미나에서 이러한 공격에 대해 한참을 난처한 입장을 보이며 스스로를 변호하려 했지만, 사실 그 변호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메츠가 틀려서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공격자들이 드러낸 스스로의 모호한 경계들이 정작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메츠는 어쩌면 ‘영화’와 마찬가지로 너무 유약했거나 너무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거나 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영화 기호학의 출발, 그리고 메츠에 대한 공격
공격자들의 문제는 의외로 아주 평범한 곳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메츠를 아주 쉽게 영화 기호학자로 분류하지만, 그는 언어학자의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했다. 즉, 영화 언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규정지으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일반 기호학의 연구자였다. 사실 이 점에 영화 기호학의 핵심·정체와 한계까지가 고스란히 노정되어 있다.
우선 영화 기호학은 어떻든 일반 기호학의 시스템 안에서 나타났다. 즉, 언어학/기호학자였던 메츠는 영화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지니게 된다. “1895년 이후로 사회에는 우리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필름이라는 기호들의 총체’가 존재한다. 게다가 기호학적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즉, 무엇인가 의미를 한정할 수 있는)”이라고 영화 기호학의 첫발을 내딛는 서문에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메츠가 이미 범한 오류를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문에 쓸 수 없는 단어를 씀으로써 말이다. 그것은 ‘필름이라는 기호들의 총체’라고 한 부분이다. 그 다음 구절 ‘기호학적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은 틀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라는 이상한 발명품은 학습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암묵적으로 이런 신호, 배합의 의미는 이러하다는 약속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초창기부터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해석되고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메츠는 이 점에 주목했다.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기호의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메츠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유들을 충분히 추적하고 나서야 개념을 갖다 붙임으로써 메츠는 스스로의 올가미에 빠져들어 버렸다. 과연, 필름이 기호들의 총체일까. 기호들이 주어진다면 작용은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작용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기호가 성립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선과 후가 슬쩍 뒤바뀜으로써 메츠는 검증해 봐야 할 대상을 기호임에 분명하다고 여기고, 영화언어의 구조를 캐들어가기 시작한다. 명민한 독자들은 이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문장 속에 슬쩍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바로 영화 언어라는 단어다.
우리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 적어도 납득할 만한 규정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용어들을 아주 쉽게 사용하곤 한다. 일상에서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소통이 되지만 사실은 틀린 용어 말이다. 그런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영화 언어’이다. 앞으로 규정해야 할 대상이 그 전에 전제되는 논리의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메츠가 영화 기호학을 전개하는 데 결정적인 난점이었다. 이후로 전개되는 영화 기호학은 그것을 하나의 열려진 대상으로 놓고 어떤 점이 기호작용을 일으키게 하고, 어떤 기준에서 그것이 언어와도 같은 작용을 하는지, 그래서 과연 그것에 언어적 개념들을 적용할 수 있는지 등을 검토하는 대신에 이미 언어이고 기호라고 전제하고 그것을 거꾸로 짜맞춰가는 쪽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호함과 불충분함과 같은 맹점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학문에 있어서 중요한 오류이고 단점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공격자들이 거침없이 따지고 들게 되었다. 하지만 만일 이게 오류에서 그치고 말았다면 여전히 영화 기호학이라는 기호학의 한 분파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출발의 고리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공격하는 자들에게 메츠가 해설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된다는 것이다. 
메츠는 사실 영화 기호학의 중요한 의의들, 성립될 수 있는 이유를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고 있었다고 본다. 다만, 미리 성급하게 규정함으로써 충분한 논리적 근거를 들어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놓쳐버렸을 뿐이다. 일상에서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통이 되지만 ‘틀린 용어’들을 우리는 쉽게 사용한다. 그런데 기호학은 처음에는 학습될 수 있는 기호들로부터 출발했지만, 바로 이 일상에서의 시니피에의 오류들까지 대상으로 수용하고 있다. 기호는 처음에는 관념에서 주어지지만, 적용되는 곳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현상의 여러 가지 사례들이 또한 기호가 작용되는 범주에 들게 되겠다. 그러므로 기호학은 이러한 일상에서의 텍스트의 여러 변용들을 당연히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른바 ‘의미작용의 기호학’이라는 커다란 범주가 ‘전달의 기호학’과는 구별되게 된 것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만일 그렇다면, 영화는 당연히 기호작용의 범주 안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메츠가 말한 대로 아주 작은 단 하나의 쇼트이든, 거대한 집합이든, 일정한 기호들의 단위가 형성됨으로써 작용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전달의 기호학 방식의 설명). 오히려 거꾸로 작용이 어떻든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럴 경우 이 작용이 이루어지는 일련의 구성이나 수용의 상태들을 검토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새로운 기호인지가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메츠는 놀랍게도 이러한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가 수용되는 그 과정의 문제들, 즉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영화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나서 다시 기호학으로 돌아와 영화 기호학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정체성과 메츠에 대한 해명

메츠는 결국 영화 기호학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연구인지를 모두 정리한 셈이고, 그것에 의해서 분석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충분히 거론한 셈이다. 영화의 정체성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고, 영화 이미지가 의미작용을 하는 과정과 거기서 발생하는 개념의 문제들을 밝히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훌륭한 분석의 틀로도 활용될 수 있는 영화 기호학을 잘 설명했다. 그러나 출발선에서 정의를 전제해 버렸기때문에 평생 그것을 짜맞춰보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현상’이다. 현상을 대할 때의 기호학자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어야 하는 것, 현상이 관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경우보다 아닌 경우들이 더 많은 것, 그것도 물론 다시 범주들을 구분하고 분류함으로써 다른 관념 또는 개념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 또 현상은 그 개념을 비껴가 버리는 것, 그것이 현상과 관념의 관계이다. 그런데, 메츠는 영화가 언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매몰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기호학을 외치며 사실 이해도 못하는 파졸리니 영화로 가기 전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Blow up>을 보라. 명확하게 영화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 그 출발점을 생각해보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 영화 안에 영화 기호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의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의미가 구성되는 과정 등이 다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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