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화 / 영화애호가

                                                                                                      최영화 / 영화애호가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향해 나란히 서있는 두 청년의 뒷모습이 쓸쓸하면서도 긴장감을 자아낸다. 세상을 등지고 서있는 이 청년들은 전날 팔레스타인 저항조직으로부터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결혼식 하객으로 위장하고 들어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과격하다고 알려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강제로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거주 지구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이십대 청년들이다. <천국을 향하여>(Paradise Now, 2005)는 자살폭탄테러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이드와 할레드, 두 청년이 이틀간 겪는 고뇌와 방황, 체념의 순간들을 조용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우리는 폭력과 대항폭력, 이 끝이 보이지 않는 폭력의 연쇄 속에서 희망과 생에 대한 의지마저 상실해버린 젊은이들의 자기파멸적인 초상을 대면하게 된다. 더불어 ‘이슬람=과격분자’라는 오리엔탈리즘의 등식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낯선 이슬람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미래를 꿈꿔야 할 젊은 청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지옥에 사느니 천국을 믿는 것을 선택한 겁니다. 이 인생에서 우린 이미 죽었어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대안도, 선택의 여지도 없기에 자폭 지시에 담담하게 응하는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의 패러디처럼 보이는 영화 제목 <천국을 향하여>(Paradise Now)는 이런 극한적인 상황을 반영한다. “인생살이가 가장 지루하다”는 사이드의 말처럼, 현실이 지옥 같다면, 죽는 것도 과히 나쁜 선택은 아닌 것이다.

이 청년들의 실존적 고민은 당면하고 있는 존재 조건에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삶은 죽음과 정반대의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이다. 그들은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이나 모레, 어느 때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예된 죽음의 시간을 살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자폭을 택하는 이유에 대해 재일조선인으로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서경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계에 절망한 사람들,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절망의 끝에서 극단적인 저항의 수단을 택하고, 그에 대한 가차 없는 진압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아무리 곤란해 보여도 그 길의 앞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어떻게 자폭 같은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자폭 행위조차도 날로 일상화해 대단한 뉴스거리도 못 되고,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파괴와 살육이 식사와 배설처럼 일상화된 세계. 극한적으로 보이는 저항조차 금세 진부하게 만들어버리는 세계. 세계 그 자체가 자폭하고 있다.”(<디아스포라 기행>, 2006)

팔레스타인인들이 테러를 감행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들에게 테러는 폭력에 대한 저항 수단임과 동시에, 미디어에 보도될 만한 사건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들은 죽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 ‘거주 지구’라고 불리는 감옥 안에서 평생 갇혀 살며, 일상적 감시와 폭격에 시달리는 부당한 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테러는 필요하다. 말하자면 테러는 극악한 현실에 대항하는 차악의 선택이다. 그러나 보도되는 사건들은 이들의 의도를 배반한다. 우리가 언론보도를 통해 가해자로 인식하는 것은 ‘자폭’을 ‘순교’라고 믿고 있는 극단적인 무장세력인 팔레스타인이지, 홀로코스트의 영원한 피해자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들은 몸을 던져 말을 하지만, 사건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과정에서 언론은 익숙한 현실을 가공해낸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전도된다.

<천국을 향하여>는 이제껏 뉴스나 영화를 통해 보아온 반쪽짜리 현실을 보충, 혹은 전복시킨다. 팔레스타인 감독인 하니 아부 아사드(Hany Abu-Assad)는 대안이 없다고 좌절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죽음보다 나은 저항방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캘리번이 정복자 프로스페로에게 배운 영어를 저항의 도구로 사용하듯이, 감독은 이스라엘 자본으로 아랍영화를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부당한 정복이 낳고 있는 폭력적 상황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동시에 팔레스타인 내부로도 향한다. 폭력에 대한 대항‘폭력’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순교자의 딸, 수하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수하는 사이드와 함께 자폭을 감행하려는 할레드를 만류한다. “그건 복수예요. 당신이 그들을 죽여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희생자와 가해자만 있을 뿐이죠”, “만약 우리에게 전투기만 있었어도 그렇게 많은 순교자는 필요 없었을 텐데, 그 점이 다른 겁니다”, “그 다른 점은 이래요, 이스라엘은 병력을 계속 증강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녀의 만류는 결국 할레드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지만, 사이드는 설득시키지 못한다.

사이드는 이스라엘 스파이의 배반 때문에 한 번의 작전 실패를 겪은 후 다시 폭탄테러를 시도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같은 길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버지는 반역자로 낙인찍힌 후 처형됐고, 아버지가 죽든 죽지 않았든, 자폭으로 죽었든 처형됐든, 비참한 현실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우리는 불의에 저항한다”라는 메시지라도 전하고 죽자고 결심한 것이다. 어렵게 텔아비브에 잠입하고 나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을 보고 함께 탑승하기를 주저하는 사이드의 모습에서 한 인간 주체를 폭탄이라는 도구화 된 객체로 격하시켜버리는 현실의 참혹함을 발견하게 된다. 갈등과 주저 후에 그는 결국 버스에 올라탄다. 사이드의 허망한 눈빛을 한참동안 클로즈업한 후, 화면은 눈부시게 흰 빛으로 채워진다. 그는 무고한 희생자들과 함께 빛으로 산화했다. 또 하나의 무용한 죽음이다. 음악도 없이 검은 화면 위로 올라오는 자막은 테러를 감행한 자들과 테러의 희생자들을 위한 조문처럼 보인다. 이렇게 영화는 자폭한 희생자들에게 비난보다는 애도를 전한다.

이 영화는 2005년 베를린 영화제와 유럽영화상, 2006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수상했으나,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상영조차 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이 영화의 미국 내 상영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제 78회 아카데미영화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명되자 수상 저지를 위해 로비를 벌였다고 한다. 현실은 이런 폭력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가공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현실의 이면을 애써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폭력의 종식은 폭력 발생의 조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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