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재 / 대구효성카톨릭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우노 쿠니이치와 하스미 시게히코 외에 초창기 들뢰즈·가타리 수용 세대에 속하는 사람으로 1933년생의 우나미 아키라가 있다. 우나미 아키라는 <프루스트와 기호>, <베르그송의 철학>을 번역했으며, <비평하는 기계> 등을 저술했다. 그는 영상미학과 알튀세르의 이론 및<존재와 언어>의 저자이자 소쉬르 연구의 대가인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언어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나미 아키라는 또 다른 저서 <말과 영상의 기호론>에서 마루야마 게이자부로를 소쉬르와 연결시키며 그의 관계론적인 언어철학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정작 마루야마 게이자부로가 <존재와 언어>에서 주장하는 ‘카오스모스’에 대한 언급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987년에 이즈쓰 도시히코가 쓴 논문 <카오스와 반코스모스>를 통해 그리스 시대 이후 사용되어 온 카오스/코스모스, 피시스/노모스라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아사다 아키라는 1983년에 이미 <구조와 힘: 기호론을 넘어서>에서 피시스/노모스 개념을 독창적으로 원용하여 자기 논의를 전개시켰다. 1980년대에 있었던 일본의 이러한 논의는 가타리가 1992년에 <카오스모스>를 쓰기 전의 일이다. 그러나 마루야마 게이자부로는 카오스모스를 신화와 언어 문제에 연결시켜 이야기하거나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뿐, 카오스모스를 사회·정치적인 차원으로 발전시킨 것은 가타리의 독창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가타리의 수용


앞서 언급한 우노 쿠니이치가 주로 들뢰즈를 소개했다면, 코가와 테츠오와 스기무라 마사히코는 우노 쿠니이치와 더불어 초창기 들뢰즈·가타리 수용 세대에 속하면서도 들뢰즈보다는 가타리를 소개했다. 1941년생으로 미디어를 전공하는 코가와 테츠오는 현상학적 맑스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주체의 전환>(1978)을 거쳐 1980년에 가타리를 접한 이후로는 가타리의 사상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타리는 1970년대 후반부터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가타리가 1980년 10월 일본을 방문하고, 아사다 아키라가 <구조와 힘: 기호론을 넘어서>를 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에피스테메>의 별책인 <리좀>이 번역되었고, 아사다 아키라에 의해 <카프카 - 소수문학을 위하여>가 소개되었으며, 1984년에는 <현대사상>이 들뢰즈·가타리 특집을 꾸미기도 했다. <앙티 오이디푸스>는 일부만 소개되다가 1986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코가와 테츠오는 1980년대 들어 한 편으로 <전자인간의 미래>, <미디어의 감옥> 등의 작업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스기무라 마사아키와 함께 가타리와의 대담집인 <정치에서 기호까지>를 소개했다. 당시 3주간에 걸친 가타리와의 인터뷰를 통해 분자혁명, 스키조분석, 자유라디오운동 등의 개념이 <일본독서신문> 등에 소개되었다.

코가와 테츠오보다 몇 살 어린 스기무라 마사아키는 가타리가 정신요법을 실천한 프랑스 라보르도 병원을 찾는 등, 코가와 테츠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가타리를 일본에 소개했다. 그는 1988년에 <분자혁명>을, 1991년에 <세 개의 생태학>을 번역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국내의 윤수종 교수가 스기무라 마사아키를 몇 번씩 찾아가 사상의 편력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스기무라 마사아키의 2005년도 저서 <분열공생론>에 나와 있다. 또한 그는 <미래로의 귀환>, <제국>을 번역하면서 가타리가 1970년대에 제시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개념이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 개념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사카이 타카시는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일본에서 마이너 중의 마이너라고 말한 바 있는데, 스기무라 마사아키에 따르면 가타리는 늘 마이너이면서 행동은 미크로하게 했던 행동주의자였다. 1981년 5월 가타리는 일본의 어느 심포지엄에 패널로 초청받았는데, 스기무라 마사아키에게 “권위주의적인 국가의 존재를 긍정하는 집회였기 때문에 도중에 패널 역할을 접었다”고 얘기한 일화가 있다. 가타리는 네그리와 <새로운 결합의 선들>이라는 책을 공저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에는 브라질로 날아가 당시 브라질 사민당의 강령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가타리의 미크로한 행동 영역은 스기무라 마사아키가 2001년에 편역한 <횡단성으로부터 카오스모스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흠 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가타리는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를 비판했으면서도 일본 대기업이 주최한 심포지엄에 초대되어 몇 번씩이나 기념 강연을 했고, 프랑스 자유라디오운동에서 손을 떼고 미테랑 정권에 전념한 이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타리가 1985년에 아사다 아키라의 주선으로 <포스트 미디어시대에 대한 전망>이라는 심포지엄에 초대되어 제시한 ‘포스트매스미디어적인 미디어’ 같은 개념은 인간의 의식과 신체를 미분적으로 분할 통치하는 현대세계를 인식하는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스기무라 마사아키는 그 개념을 프랑스의 자유라디오운동보다는 일본의 미니FM 자유라디오에 더 적합한 것이라 파악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가타리는 아사다 아키라 등과 함께 일본의 자유라디오국을 방문하여 방송을 하기도 했다. 가타리의 이 당시 활동은 <동경극장 - 가타리, 동경에 가다>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다.


이론의 실천적 수용을 위하여

        

일본의 들뢰즈·가타리 수용사에서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수용이 <주체의 전환> 이후 이론주의로 경도됨으로써, 욕망을 생산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1980년대 이후로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점차 인기를 끌었지만 그들의 사상을 단지 서양의 사상으로, 자신들의 욕망의 결여를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론가들 이후 카야노 토시히토, 마츠모토 쥰이치로우 등 30대의 젊은 이론가들이 ‘지각불가능한 집단성의 차원’을 고민하며 들뢰즈·가타리를 실천적으로 읽기 위한 이론작업을 하고 있지만, 코가와 테츠오가 1970년대에 고도자본주의사회에 대해 행했던 실천적인 고민, 더 거슬러 올라가 미키 기요시의 자본주의와 계급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98년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일본의 데리다주의자이자 가라타니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의 해설을 맡았던 아즈마 히로키 또한 들뢰즈·가타리 사상의 정치성과 무관하게 이론적인 작업만 하고 있다. 스기무라 마사아키 이후의 젊은 이론가들은 가타리보다는 서양 철학자들의 계보 차원에서 구체적인 실천과 유리된 채 주로 들뢰즈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들뢰즈·가타리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 가라타니 고진이 1990년대에 ‘NAM’ 운동 같은 실천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서양에 대한 욕망 충족을 통해 일본의 사상이 자기 발화의 위치를 찾고,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고민함으로써 욕망생산의 단계에 도달할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스즈키 이즈미의 2002년도 작업처럼 들뢰즈 사상의 초기 생성 과정을 탐구하고, 들뢰즈의 <무인도>, <광인의 두 체제> 등 서양사상을 이 잡듯이 철저하게 수용하는 일본 지식인의 태도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비록 들뢰즈·가타리의 연구자가 극소수이고 연구 범위가 제한적이며 수용 시기 또한 일본에 비해 20년 정도 늦지만, 이제는 우리도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좀 더 제대로 번역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들의 사상을 지금/여기의 현실에 원용함으로써 간접화법이 아니라 나의 발화 위치에서 서양 사상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이다. 우노 쿠니이치가 일본의 독자적인 사상의 형성에 대해 의문부호를 찍었던 것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들뢰즈·가타리마저 80년대의 루카치처럼 수용되어서는 서양사상을 뚫고 나아가기 어렵다는 뜻일 터이다. 특히 제국의 침투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는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은 가타리의 실천적인 고민을 더욱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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