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재 / 대구효성카톨릭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사카이 다카시에 따르면 1980년대에 유행했던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현재의 일본에서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에 해당하는 사상이다. 우리와는 정반대되는 경향이다. 물론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연구 폭은 대단히 넓다. 그렇다면 서양사상으로서의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그동안 일본에서 어떤 맥락에서 수용되어 왔을까.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에 교토학파에 속하는 일본의 미키 기요시는 <파스칼에 있어서 인간의 연구> 등의 저서를 통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또한 도쿄제국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와쓰지 데쓰로는 잡지 <사상>에 <풍토>를 연재해 주목을 받는다. 니시다 기타로의 제자인 미키 기요시와 와쓰지 데쓰로가 이렇듯 하이데거의 철학에 심취한 것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사카이 나오키가 ‘대(對)―형상화의 도식’이라고 불렀던 이항대립 속에서 일본의 근대/근대성을 고민하기 위한 것이었다. 니시다 기타로의 경우처럼 미키 기요시와 와쓰지 데쓰로는 인간 존재를 각각 ‘시간성’과 ‘관계’의 관점에서 파악해 스스로의 발화 위치를 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와쓰지 데쓰로는 스스로의 철학을 서양과 동일화했고, 미키 기요시는 서양 철학을 뚫고 나아가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가타리를 소개한 1987년 4월 27일자 <일본경제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일본인은 서양인을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러한 점이 있다. 거꾸로 봐도 또한 참이다.” 고모리 요이치가 호미 바바의 논의를 빌려 욕망의 모방에 대해 말했듯이, 일본은 철저하게 서양과 닮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사카이 나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은 단순히 세계 안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수성일 뿐만 아니라 ‘일본’ 등의 특수성을 처음부터 성립시키는 편재성으로서의 보편성의 위치를 부여받고 있다. 즉 일본에서 철학의 결여는 ‘서양’과의 비교에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편재화에 동반하여 ‘절대적인 결여’로서 지각된다. 그것은 ‘일본인’이 그와 같이 편재하는 ‘서양인’의 욕망을 내면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즉, 일본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수용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처럼 서양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고 있다. 일본에서 들뢰즈·가타리를 수용하는 층은 사회사상, 철학, 미학, 사진, 정신의학 등으로 그 폭이 넓지만, 프랑스 유학파가 상당히 많다는 것도 앞의 인용문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들뢰즈 사상의 수용


들뢰즈를 일본에 제일 먼저 소개한 사람은 1936년생으로 영화비평가이자 동경대학교 총장을 지내기도 했던 하스미 시게히코였다. 그러나 일본의 들뢰즈·가타리 수용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이는 우노 쿠니이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48년생으로서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직접 들뢰즈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들뢰즈·가타리의 <푸코>, <천의 고원>을 번역하기도 했다.

우노 쿠니이치는 1996년 <현대사상>이 마련한 ‘들뢰즈 특집’에 실린 <질 들뢰즈의 전장>이란 글에서 일본인으로서, 그리고 아시아인으로서 들뢰즈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고민 속에서 “일본의 독자적인 사상이 어떻게 해서 형성되지 않는지 하는 감상이 여전히 생겨난다”고 토로한다. 우노 쿠니이치는 일본이 유럽과 거의 같은 사상권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묘하게도 그 바깥에 있다는 양의성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마루아먀 마사오가 말한 ‘차례차례 되가는 기운’이라는 말을 들뢰즈의 ‘생성변화’에, 일본 천황제를 들뢰즈의 ‘리좀’ 개념에 포개는 발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적인 사고에서 지적한 ‘되기’란 동일한 융합의 과정인데 반해, 들뢰즈의 되기는 고정화를 피하는 사고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들뢰즈의 리좀 개념을 천황제에 포개는 발상은 참신하면서도 일본인의 의식이 리좀으로서의 천황제에 의해 엮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사카이 나오키의 말처럼 일본이 절대적인 결여를 극복하는 방식은 유럽도 일본도 아닌 제 3항을 발견하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욕망을 생산하는 길이 아닐까.

한편 우노 쿠니이치는 초월론을 피하려는 들뢰즈의 사상이 불교와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면서, 들뢰즈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철학과 우정’을 일본적인 ‘간(間)’이라는 관념에 연결시킨다. 들뢰즈는 그리스에서는 우정이라는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철학이 형성되고 실천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제관계라는 것이 존재하고, 학문적인 서열관계가 분명하며, 또한 그것이 동시에 권력으로 작동하는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동양에서는 들뢰즈의 표현대로라면 철학이 ‘사막’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노 쿠니이치가 언급한 것처럼 동양에는 극도로 세련된 내재성의 사고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재적인 동양’, ‘잠재적인 일본’ 같은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더 고려해봐야 할 문제로 보인다. 우노 쿠니이치도 일본의 ‘간’이라는 관념이 중심을 피하고 강고한 계층적인 질서를 피하려는 미학임과 동시에 수직적인 사제관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에 들뢰즈의 <카프카>, <베르그송의 철학>, <프루스트와 기호>, <니체와 철학>이 번역되었고, 80년대에는 <푸코>, <앙티 오이디푸스>, <의미의 논리학>이 번역되었으며, 90년대에 <천의 고원>의 번역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가타리보다 들뢰즈 연구자가 더 많고, 들뢰즈를 실천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철학사가로 자리매김하는 경향을 보인다. 마츠모토 쥰이치로가 들뢰즈의 철학이 흄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의미의 논리학>이나 <차이와 반복>을 들뢰즈의 주저로 파악하는 것이 그 한 가지 예다.


들뢰즈와 정치


주지하다시피 <차이와 반복>이 나왔던 1969년은 들뢰즈의 철학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지점이다. 1969년 자넷 콜롬벨은 들뢰즈와의 인터뷰에서 들뢰즈의 헤겔변증법에 대한 부인, 맑스에 대한 언급의 부재 등에 대해 질문한다. 요컨대 들뢰즈 당신의 철학이 정치적 차원을 가질 수 있느냐, 또한 혁명적 실천에 공헌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당시 “위험한 질문”이라고 짤막하게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이 말을 음미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자. “선(禪) 안에는 아주 유효한 것, 위험한 것이 많이 존재합니다. 사회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이러저러한 시대의 철학에는 이러한 심급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개체, 낭만주의 시대에는 인간, 그리고 현대에는 특이성이 있는 것이죠. 그러나 모든 심급들은 존재하고 역사 안에서 태어나며 스스로 사회관계에 의존합니다. 그러니까 혁명이란 이러저러한 심급들의 발전에 대응하는 이 관계들을 바꾸는 것입니다. 혁명의 현실적인 문제, 관료주의를 갖지 않는 하나의 혁명적인 문제란 새로운 사회관계의 문제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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