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생태환경

근대화’라는 용어가 있다. 기존의 농업적이고 목가적이었던 삶의 환경을 도시중심의 자본주의적 생산체계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함축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특히 한국과 같이 20세기의 저개발 지역에서 중요한 정치경제적 화두로 등장한 바 있다. 그것은 단시간 내의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 핵심문제의식을 반영하여, 발전주의 혹은 개발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 침투했다. 서구의 강대국들이 향유하고 있던 물질적 부를 따라가기 위해 경제발전의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개발주의적 근대화 담론은 박정희 정권기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 ‘개발’의 환상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의 노동을 착취하고, 도시와 농촌의 환경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그런데 경제성장의 일정궤도에 오른 오늘날 이러한 담론이 그 외양을 변모한 채 서울에 침투하고 있다. ‘생태도시’, ‘뉴타운’의 건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시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서울의 도심재개발 전략이 그것이다.

청계천복원사업과 뉴타운사업
서울시의 이 전략은 ‘청계천복원사업’을 통해 먼저 착수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청계천복원사업은 청계천에 있던 노점상들과 빈민들을 몰아내는 폭력을 수반하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복원사업이 완료되며 그 폭력의 흔적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오히려 청계천에 하천이 복원되고, 하천 주위로 인도와 여가공간이 생겨나며 ‘생태환경복원’의 과제는 성취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때로 노점상과 빈민들의 판자촌이 즐비하던 기존 청계천의 모습과 대조되며 그 성과를 조명받기도 한다. 21세기 인류의 화두로 등장한 ‘생태’와 문화공간을 연다는 명분 아래 폭력이 아무런 가책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청계천복원사업이 그나마 생태환경이라도 살리는 것이었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듯이, 반드시 그런것 같지는 않다. 먼저, 하천을 보면 문제가 금방 드러나기 시작한다. 지금 청계천의 하천은 한강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홍성태 교수(상지대 문화컨텐츠학과)에 따르면, 그 물은 상류로부터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전기모터를 통해 막대한 전류를 소모하며 인위적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천을 흐르게 하기 위해 전기모터가 서울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이 숨쉬는 청계천’이라는 서울시의 사업모토에는 그 하천의 이면에 흐르는 전류가 보여주듯이, 반생태적 사업전략이 은폐되어 있다.
이러한 반생태적 사업전략에는 새로운 도심 재개발전략이 노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 04년 4월 서울시는 ‘도심재개발기본계획변경안’을 제시하며, 청계천복원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계획안은 ‘도심 재개발 구역에 주상복합 건물을 지을 경우 건물 높이를 현재 규정보다 1.5배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그 핵심골자로 하고 있다. 새로운 청계천의 환경을 주위로 고층건물들이 들어설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강남의 타워펠리스를 연상케 하는 고층건물들의 포위 속에서 과연 서울시가 새로운 생태공간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까. 그것을 우리가 생태도시라 불러도 괜찮은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뉴타운 ‘개발 붐’ 속에서 재확인된다. 이미 흑석시장의 철거에서 확인되었듯이, 뉴타운 건설전략은 기존 도시생활공간을 거대자본들의 새로운 상업공간으로 재편한다는 계획을 노정하고 있다. 이에 올해에만 4만 8,000여 가구의 새로운 아파트가 서울에 들어설 것이라는 보도가 있어 변화의 물결이 심상치 않음을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7,397가구가 ‘생태전원도시’라는 이름을 내건 은평뉴타운에 들어선다고 하니, 서울시가 내세우는 ‘생태전원도시’의 실상이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혼란에는 ‘품격 있고 경쟁력 갖춘 21세기형 강북 주거환경 조성’이라는 서울시의 정책상의 목표가 깃들어 있다. ‘품격’있고,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강북의 주거환경은 ‘생태전원도시’의 외양을 띠고 서울시를 고층건물 건축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신개발주의의 환영
물론, 환경친화적인 삶의 공간을 조성한다는 것이 건물의 건축 일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떠한 공간이라도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에는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손길이 곧 생태계에 대한 폭력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서울시가 내걸고 있는 ‘생태도시’의 모토에 생태환경에 대한 배려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심지어는 인간에 대한 배려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에 대한 배려들은 언제나 사업홍보를 위한 수사학적 차원으로 머물거나 매우 부분적인 수준에서만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뉴타운사업이 추진되는 거의 모든 곳에 고액의 주상복합형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 기존의 주민들이 폭력적으로 배제되고, 자연환경도 ‘여갗와 ‘문화향유’라는 명목 아래 강압적으로 조작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그 뉴타운에 대규모의 공원과 여가공간이 주어진다는 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거대규모의 여가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그 생태에 대한 고려가 어떠한 사업전략 속에서 배치되고 있는 지를 봐야 한다.
생태의 문제는 인간이 모든 역사를 관통하며 부딪혀야 할 문제이다. 인간이 생명체이고, 생태계의 자연원리에 지배받으며, 그 지배 안에서 자신의 공간을 구성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도시공간의 재개발은 생태계라는 전체 생명체에 대한 고려 없이는 결코 충분해질 수 없다. 이럴 때에만 ‘개발’의 환영이 폭력의 기능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서울에서 그러한 고려들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서울은 지금 멈추지 않는 ‘개발’의 환영 속으로 다시금 빠져 들고 있다. 

고태경 편집위원  donghwa@cauon.net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