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

여자의 흰 블라우스에 붉은 와인이 쏟아진 이후 사람들은 과격해졌다네. 마치 피를 본 짐승처럼 흥분된 듯 보였어.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네. 터져 나오는 음악소리와 그 소리에 묻히지 않으려고 발악하듯 내뱉는 사람들의 목소리, 현란하게 번쩍이는 조명,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흥분된 사람들의 몸짓들. 언제 그곳을 빠져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 다만 나답지 않게 과음을 해버린 것은 사실이야. 여자의 옷에 와인을 쏟은 게 바로 내게 말을 걸었던 그 남자였다는 사실이 평범하지 않았던 그날 오후 일들의 연결고리쯤으로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내 분위기에 휩쓸려버렸지.

5.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버스표 판매소 안 의자에 앉아 있었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사내가 - 나보다 먼저 판매소에 들어갔던 바로 그 사내라고 나는 생각 한다네 - 내 옆에 서 있었어.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더군.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와 통화를 했어. 나는 사내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문득 그 사내가 파티 장소에서 만난 그 남자와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외모가 아니라 이미지나 분위기가 말이야.
사내는 통화를 끝내더니 내게 따라오라고 손짓했어.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지.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판매소 바깥으로 나와 보니 버스정류장이 아닌 사방이 벽으로 막힌 통로였다네. 사내는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내를 따라갔다네. 오늘 겪은 일이나 본 것들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걸 믿어주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사내가 말했지.
복도가 끝나는 곳에 작은 문이 있었고, 우리는 그 문으로 나갔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하상가가 펼쳐져 있었지. 사내는 나를 데리고 미로 같은 그곳을 헤치고 다녔네. 그러는 동안 점차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내 상가 안은 혼잡해졌지. 그 중에 사내를 놓치고 말았다네. 그제야 사내에게 당했다는 것을 눈치 챘어. 길을 찾지 못하게 하려고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 거지. 나는 밖으로 나왔던 작은 문을 찾으려고 미로 같은 그 상가 안을 한참동안 헤매고 다녔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동시에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네.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지금이 아니면 영영 확인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 그러나 나는 그 문을 찾을 수 없었다네. 나는 결국 내가 들어가던 판매소로 돌아가 다시 찾아보기로 했던 거지.     
그래. 내가 아침에 버스표 판매소 문을 두드리며 소란을 피운 일에 대한 정당한 답변이 될 수 없다는 것 아네. 더군다나 술을 마신 뒤의 일이니 주정쯤으로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아니라고? 자네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하지 않은가. 그래. 내 말을 믿으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네.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아니까.
그런데 말이야……
만약엡… 내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어쩌겠나? 납득시키지 못할 뿐,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한번 말해보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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