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 / 영화평론가

‘김기덕, 여성영화의 퇴행인가?’ 사실 이 질문엔 일종의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는 으레 여성 캐릭터들이 중시되긴 하나, 정작 그의 필모그래피 중 대다수는 여성적 시각을 특권시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장르로서의 ‘여성 영화’(Woman's Picture)가 아닌 탓이다. 물음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김기덕, 반(反)-여성영화인갗쯤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하자. 내 답은 “아니다”이다. 가령 2007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받기도 한 “김기덕의 열네 번째 상상”, <숨>에 눈길을 주면 반-여성(영화)적이긴 커녕 외려 진일보한 여성영화로서의 가능성까지 감지된다. 아니, 그간 접해온 이 땅의 그 어떤 여성영화보다도 한결 더 여성(영화)적으로 다가선다. (박)지아가 분한 극중 여주인공 홍주연의 행위는 ‘거의’ 전적으로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숨>으로부터 그 전작들, 특히 장편 데뷔작 <악어>(96)에서 <야생동물보호구역>(97), <파란대문>(98), <섬>(00),    <수취인불명>(01), 그리고 <나쁜 남자>(01)에 이르는, 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로 시선을 돌릴 경우, 그의 영화들은 예의 ‘반-여성(영화)적’ 혐의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늘 구타ㆍ폭행ㆍ강간ㆍ살해당하는 여성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때론 치가 떨릴 만큼 강한 불쾌감을 안겨주곤 하는 잔혹 묘사와 더불어.
상기 요소들로 인해 김기덕은 그 비판자들로부터 합당한 비판을 넘어, 때론 인신공격성 비난까지 받기도 했다. 그 비판에 앞장섰던 한 여성평론가는 <나쁜 남자>와 관련해 "여성에 대한 어떤 성찰도 없는 이 영화를 지지하는 행위는 여성들에 대한 모독일 뿐"이라며, 영화 텍스트를 넘어 해당 영화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 평론가의 견해 및 분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대체 무슨 근거로 <나쁜 남자>에서 “여성에 대한 어떤 성찰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마치 다수의 관점인 것 마냥 내세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을 따름이다. 남-녀, 성(性) 여부를 떠나 세상의 모든 텍스트들은 개인차에 따라 전혀 상이하고 다양한 해석ㆍ수용이 가능한 법이거늘 말이다. 그리고는 그저 김기덕 지지자들 중 남성 못잖게 여성들 또한 많은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싶다. 혹 김기덕 영화의 ‘당하는’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현실 세계에 대한 감독의 이해를 읽어낼 수는 없는 걸까. ‘피해자로서의 여성’ 대 ‘가해자로서의 남성’이라는 뿌리 깊은, 워낙 이분법적 도식이기에 전폭적으로는 동의하고 싶지는 않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작자로서의 비판적ㆍ성찰적 시각을. 그렇게 보면 그 반복적 설정 및 묘사에서 감독의 어떤 염원이 감지된다. 지독히도 남성중심으로 흘러가는 잔혹무도하며 폭력적인 이 세상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비판과 자기반성, 그리고 그 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희미한 소망 같은 것을.

김기덕 영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
<해안선>(02)을 기점으로 일정한 거리를 띄기 전까지, 김기덕에게 줄곧 크고 작은 성원을 보냈던 것도 실은 그래서였다. 그때만 해도 난 상기 여성평론가가 거품 물고 힐난한 김기덕의 열혈 지지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난 확언할 수 있다. <악어>에서 <나쁜 남자>에 이르는 김기덕의 그 말썽 많았던 문제작들만큼 내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하게끔 한 영화텍스트는 거의 없었다고. 난 그의 영화들을 지지하되 마냥 즐기진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클리셰가 되어버린 듯한 그의 잔혹 묘사들이 적잖이 불쾌하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 감정을 통해 오히려 내 자신도 그 잔혹의 공모자라는 사실을 상기 ‘당했고’, 그 ‘당함’을 통해 ‘어떤 배움’을 얻었다. 그 점에서 김기덕의 영화들은 가능한 반성적 남성으로서 머물게끔 자극·독려하는 일종의 계기요 촉매제였다.
거창하게 영화 연구를 거들먹거릴 필요조차 없다. 행간의 숨을 뜻을 읽어야 한다고, 영화 읽기에서 ‘눈에 보이는 것’(what is seen)이나 '말해진 것'(what is said)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건 상식이 된지 오래다. 60년대 이후의, 현대적 영화 읽기에선 더더욱 그렇다. 어떤 종류의 텍스트에서건 기표와 더불어 기의를, 표면과 더불어 구조를, 외연과 더불어 내포를, 현상과 더불어 이데올로기를, 의식과 더불어 무의식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순간, 김기덕 영화들에서는 아주 특이한 점이 감지·발견된다. 당하는 여성을 집착적으로 묘사하건만 좀처럼 ‘매혹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적잖은 여성영화들에서도 심심치 않게 드러나곤 하는 그 매혹적 전시성이 부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재는 여성의 몸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카메라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당하는 여성을 보여주되 비판적 거리ㆍ성찰을 견지하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흥미롭지 않은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오로지 당하는 여성의 잔혹 묘사 등을 들어 김기덕 영화가 반-여성(영화)적이거나 여성 혐오적이라고 단죄하는 건 오독에서 기이한 오판이지 않을 성싶다. 김기덕 영화는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당하는 여성의 잔혹 묘사를 통해 기존의 남-녀 관계, 나아가 인간관계 전반에 대해 그만의 해석을 내리는 시도라고. 따라서 김기덕은 페미니즘의 견지에서도 다시, 달리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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