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론

이종호 /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교수

이연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더 원>은 평행우주 개념을 주요 소재로 다룬 영화이다. 125개의 우주로 이루어진 우주연맹체는 평행우주로 만들어진 각각의 우주들이 무질서하다는 판단 하에 이들의 질서를 바로 잡는 멀티버스(Multiverse) 수사국을 설립한다. 125개 우주의 힘이 하나로 모이면 우주의 균형이 깨지므로 우주감시요원들은 여러 우주의 양자터널을 만들어 통제한다. 그런데 나쁜 이연걸(율라우)이 125개의 우주에 각각 다른 이연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머지 이연걸을 살해하여 천하제일의 힘을 얻으려고 한다. 여하튼 율라우가 123명의 이연걸을 살해하고 지구에서 LA 보안관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좋은 이연걸(게이브)을 살해하려고 지구로 찾아온다. 그런데 멀티버스의 우주감시요원들에게 문제가 생긴다. 123명의 이연걸을 살해한 율라우가 게이브를 살해하면 우주는 평형을 잃고 산산조각나므로 두 사람 모두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행우주 개념을 <큐브2(Hypercube)>는 보다 극적으로 보여준다. <큐브2>에서는 사립탐정 사이먼 그래디가 똑같은 사람을 세 번이나 죽인다. 옆방 문을 열면 자신이 죽는 모습이 보이고, 이쪽 방에서는 죽었던 사람이 저쪽 방에서는 살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 보다 확대하면 지금 이 시간에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그래서 어느 우주에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가 존재할 수도 있다.

우주에 대한 다층적 개념화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평행우주의 개념은 우주가 빅뱅에 이어 마치 풍선처럼 팽창하고 있다는 인플레이션 이론에서 출발한다. 조그마한 점에서 우주가 출발했다면 현재와 같이 거대한 우주가 되기 위해서는 갑자기 규모가 커지는 어떤 극적인 상황이 일어나야 하는데 인플레이션 이론으로 이를 설명한다. 그런데 만일 우주가 어느 순간 급속 팽창을 일으켰다면 이와 동일한 현상이 우주의 다른 부분에서도 또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것이 우주는 타원형의 풍선이 아니라 이를 비비 꼬아서 여러 혹(딸 우주, daughter universes)이 달려 있는 풍선인형의 형태를 띨 수가 있다는 무한우주론의 출발이다. 이런 평행우주에 대한 이론적 배경은 양자역학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공간상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공간은 시간과는 달리 어느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성에 대비하여 시간의 경직된 방향성을 물리학에서는 ‘시간의 비대칭성(time asymmetry)'이라고 한다. 이 비대칭성에 착안하여 앨리스(G. F. R. Ellis)는 만약에 우주가 무한하다면 우리가 모르는 셀 수 없는 대폭발(Big Bang)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제각기 나름대로 진화하고 있는 우주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평행우주 개념은 인간이 선택해야 할 조건 모두가 가능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세계는 나머지 모든 세계와 똑같고 시간도 동일하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이러한 평행우주 개념은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거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양자론에는 확률과 중첩이라고 부르는 모호한 상태가 도입된다. 예를 들어 한 입자가 두 가지 스핀 상태(업과 다운)를 가질 수 있다고 할 때 우리가 그것을 측정하기 전까지는 그 입자의 스핀은 업일 수도 있고 다운일 수도 있으며 또는 업과 다운이 중첩돼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모호한 중첩 상태에 있는 그 입자에게는 자신만의 평행 우주들이 존재하는 셈이다. 57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휴 에버렛 3세(Hugh Everett III)는 존 휠러(John Wheeler) 교수의 지도 하에 매우 색다른 양자론의 영향에 대해 도전했다. 그는 우선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입자를 파동 또는 중첩된 파동들의 합으로 기술하는 방정식)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가능성 또는 상태가 실제로 존재하는 상황을 추론했다. 즉 측정하는 순간 중첩 상태가 붕괴하는 대신에 각자의 우주에서 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중첩 상태에서 입자에게는 자신만의 평행 우주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측정을 하는 순간, 특정 결과(예컨대 스핀)만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일부가 된다. 나머지 가능한 결과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현실 세계를 걸어가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우주에 하나의 현실만 존재한다고 보는 대신에 다중 우주에서 모든 현실이 존재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휴 에버렛이 내세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매 순간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평행 우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각각의 우주는 매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결합된 것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의 모든 경우를 조합한 무한한 수의 우주가 존재하는 셈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다중 우주는 양자의 틀에서만 존재하지만 이 이론을 옥스퍼드 대학교의 데이비드 도이치가 강하게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다중우주 해석’(multiverse interpretation)을 통하여 우주는 우리가 선택하는 순간에 여러 개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무한개의 평행우주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복잡한 교차점을 통과하는 기차처럼 하나의 특별한 경로를 쫓아간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우주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마린 가드너는 우리 우주를 무한히 뻗은 평면으로 가정하면 다른 평행우주들은 우리우주의 아래위로 차곡차곡 쌓여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고 적었다. 실제 우리우주는 3차원 공간에 존재하므로 평행우주를 생각하려면 4차원 이상의 공간을 가정해야 한다. 평행우주는 4차원 이상의 공간에 무한히 많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렇다면 바로 이웃하는 평행우주는 우리에게서 불과 몇 센티미터 옆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이 이론을 적용하면 <큐브2>에서 나타나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큐브는 바로 무수한 평행우주들이 교차되는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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