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영 / 영화평론가

온 세상을 태워버릴 듯 뜨겁게 타들어가는 어느 여름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간 10여명의 여성들. 그저 백주대낮 동네 한 복판에서 부인을 복날 개처럼 패던 남자에게 달려들었을 뿐인데, 경찰은 옥상 아래 진을 치고 ‘살인자’라 윽박지르고 특종을 노리는 언론과 세상은 그들을 남성의 폭력에 대항한 투사라 치켜세운다. 서 있는 것만도 숨이 턱턱 막히는 그 뜨거운 오후, 그들은 왜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야 했을까. 이민용 감독의 95년작 <개 같은 날의 오후>는 남편에게 맞는 여인을 돕다 졸지에 살인자로 몰려 옥상에 모이게 된 평범한 여성들이 벌이는 한 바탕 신명나는 난장, 한 여름 시원한 소나기와도 같은 작은 소동을 그린 영화다.
주지하다시피 90년대는 한국영화가 내외적으로 급격하게 확장되고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대기업 같은 신규 자본의 유입과 더불어 본격적인 산업으로서의 구조와 욕망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더불어 이 시기 새로운 감수성과 스타일로 무장한 젊은 감독들의 대거 등장은 서사와 표현기법은 물론 주제의식과 관심 분야에 있어서도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영화들을 탄생시켰으며 달라진 사회와 요구 속에서 이를 수용하는 관객들의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영화에서 언제나 주변에 머물던 여성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등장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개 같은 날의 오후>는 같은 해 발표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두 편의 영화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나 <301·302>와 달리 드러내놓고 여성영화임을 밝히지는 않지만 오히려 보다 직접적이고 유쾌하게 한국 사회를 사는 여성의 현실과 일상 속에 내재된 분노, 그리고 그 속에서의 연대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일탈에서 연대로
어쩌면 날씨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일 40도가 넘는 최악의 더위와 지독한 가뭄 속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이유없이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니 사람 한 둘 돌아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싶다. 하지만 그 시작은 우발적이었을지언정, 영화 시작부터 언제라도 터질듯이 꽉꽉 눌러 보여지는 여성들의 분노는 그들이 휘말린 사건이 단순한 집단 광기나 우연의 발로는 아니라고 말한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주문에 배달까지 도맡는 부인과 덥다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편, 아이의 아이스크림 하나도 아끼는 부인과 부인 몰래 같은 아파트 여인과 대낮에 질펀한 정사를 벌이는 남편, 이유 없이 의처증 남편에 시달리는 여인, 그리고 평생 키워왔을 아들, 며느리의 타박에 마른 눈물을 삼키는 노인 등 영화의 첫 부분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소개는 다분히 도식적이고 단순할 정도로 이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이후 여성들의 해방구인 옥상과 그들을 내려오게 하기 위해 고기를 굽고 뒷조사까지 서슴지 않는 옥상 아래 치사한 남성들의 공간의 대조로 이어지며 드센 ‘동네 아줌마’들의 옥상으로의 도피에서 여성 대 남성의 대결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오랜 세월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아왔을 사연과 분노, 그것은 여성들 스스로 고립된 옥상이라는 남성들의 시선과 통제에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 모이는 순간 하나 둘씩 쏟아져 나온다. 그 과정에서 옥상 위 여성들은 바람핀 남편의 공개 사과와 공평한 재산 소유권, 독신 여성에 대한 편견 종식과 내친 김에 여성들의 더 많은 참정권까지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물론 영화에서 통쾌한 부분들은 이러한 주장이나 선언들은 아니다.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남편과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남성과 주류 사회를 향해 내려지는 그들의 일갈과 함께 가정주부, 어머니, 독신여성, 호스티스, 그리고 여장남자 등 각각 다른 이름으로 살아왔던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라는 하나의 이름 앞에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일 것이다. 처음 경찰을 피해 옥상으로 올랐던 그들은 초조한 모습이었지만 경찰을 향해 오물을 집어 던지고 치마를 들썩이며 야유를 퍼붓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바탕 신나는 축제를 벌이듯 통쾌하기 그지없다.

해방과 연대, 그 이후
순간의 일탈에서 여성으로서의 연대, 하지만 옥상이라는 특정한 공간이 일시적인 해방구는 될망정 본질적인 모순의 해결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영화 속 여성들 역시 ‘여성’이라는 이름 앞에 모였지만 옥상을 내려와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그들은 다시, 가정주부, 어머니, 술집여성, 여장남자 같은 그들에게 부여된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는 좀처럼 변하거나 해결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옥상 아래 현실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그 부분은 관심 밖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연대는 언젠가는 끝날 한 번의 축제, 신나는 퍼포먼스에 다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왜 여전히 옥상을 지킬 것 같던 그들이 돌연 “할 일은 다했다”며 옥상 아래로 스스로 뛰어 내리는지,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싸우던 욕쟁이 호스티스 윤희가 진압대장에게 갑자기 악수를 청하며 화해의 몸짓을 취하는지, 그 순진하고 낙관적인 결말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일탈에서 오는 일시적인 해방감은 있지만 본질적인 해결점은 제시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이 영화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자 90년대 이른바 대다수 ‘여성영화’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주유신이 지적하듯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부각되기 시작한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은 한국영화 내부와 관객 모두에게 ‘여성영화’라는 변화를 가져왔지만 이후 한국 상업영화에서 여성의 위치와 모습은 여전히 무기력한 희생자로 머물거나 아예 배제되는 등 더욱 공고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억압되고 착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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