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미 / 영화평론가

<그대안의 블루>(1992)와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는 90년대의 감수성이 물씬 풍기는 영화이다. <그대안의 블루>는 이후 듀엣 곡이나 모던한 세트, 강렬한 색감 등으로 기억되며,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역시 최초의 남자전라누드와 전면적인 PPL 광고 등으로 기념된다. 두 영화의 주제는 ‘일하는 여성의 자각과 성장’인데, 이러한 주제의식은 <결혼이야기>등 당시 성공한 기획영화가 파악한 주 관객층의 입맛에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영화를 세련된 감각과 여성관객의 취향에 편승한 ‘트렌디 영화’로 치부하기엔 껄끄러운 점들이 많다. 첫째 <그대안의 블루>가 제기한 “사랑은 여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란 명제는 당시로선 퍽 과격한 주장이었고, 둘째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꽤 수위가 높다. 그래서인지 <그대안의 블루>는 최초의 ‘페미니즘 영화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는 ‘페미니즘의 탈을 쓴 허무주의 영화’(채명식)등의 평가를 받으며 묻혀버렸다. 본고에서는 <그대안의 블루>가 지닌 문제의식과 한계를 지적하고,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가 전작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간 점과 새로운 한계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대안의 블루> 1세대 페미니즘적 주장과 한계
<그대안의 블루>는 ‘여성은 사회적 성공을 위하여 사랑과 가정이라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1세대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주장에 비견된다. 유림(강수연)은 (중매)결혼을 웨딩드레스 바람으로 뛰쳐나옴으로써 거부하였지만, 사랑(연애)의 가치는 굳게 믿는다. 그녀는 특이한 페미니스트 호석(안성기)에게 ‘찍혀’ 디스플레이어로 키워지고, 사랑을 좇아 결혼한 뒤 일과 가사 모두를 완벽히 수행하려 애쓰다 일을 포기하고 가사에 전념하던 중, 호석으로부터 비디오테이프를 받고 자기 과거를 돌아본다. 그녀는 이태리로 가 호석을 만나지만, 홀로 돌아와 이혼하고 다시 일을 시작한다. 즉 사랑(가정)의 가치를 믿었던 여성이 남성의 지도 하에 전문인으로 키워지고, 가정(사랑)이라는 허위위식에서 벗어나 일하는 여성으로 독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대안의 블루>는 여성의 사회적 성취를 주장하고, 사랑과 결혼이 허위의식임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 지향을 가진 영화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의 방법론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첫째, 그녀의 각성을 지도하는 것은 남성이다. 여성은 스스로 억압을 깨닫지 못하고, ‘누이(들)’에게 연민을 품은 ‘오빠’가 가르쳐주어야 저항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오빠-페미니즘’인 것이다. 둘째, 비디오테이프 속 그녀의 모습은 호석이 촬영한 것들로, 그녀는 호석의 관음적(?) 시선에 포획된 객체가 된다. 그녀는 카메라에 의해서도 관음적으로 포착된다. (남성)관객은 당돌한 그녀와의 동거를 훔쳐보는 재미를 누린다. 셋째, 여성이 성공하기 위해선 가정을 포기해야하며, 이를 위해 각자의 결단이 요구된다는 단순논리가 지닌 함정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가족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여성들에게 “성공을 원하면 가정을 포기했었어야지 … 가부장제의 억압은 너희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논법은 여성문제의 책임을 여성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현재의 가족제도를 변혁시킬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다. 이상의 문제들이 <그대안의 블루>가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표방하면서도, 여전히 남성중심적 시선에 머물러있다는 지적을 받게 하는 것이다.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전작을 뛰어넘은 점과 새로운 한계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에선 전작의 문제들이 사라진다. 첫째, ‘오빠-페미니즘’ 대신 ‘여성 멘토’가 나온다. 서부장은 “편파적으로 여자를 키우려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상민(채시라)을 지지한다. 물론 상민이 직업인으로 성장하는 데 김감독(문성근)의 역할도 크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전작의 사제지간 혹은 조수-사수관계가 아니라, CF감독과 카피라이터라는 파트너쉽이다. 그는 광고와 사랑에 대한 냉소적 지론을 통해 그녀를 ‘광고장이’로 키워내는 역할을 할 뿐, 여성으로서의 각성을 지도하진 않는다. 둘째, 김감독이 시선의 주체이고 그녀가 대상이 되는 장면들이 초반부에 존재하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진 않는다. 또한 카메라의 관음적 시선도 그녀를 향해 있지 않다. (전작의 춤추는 유림의 누드 대신, 김감독의 누드가 나온다) 셋째, 상민은 미혼모로서 직장을 다닌다. 모성을 포기해야 할 질곡이 아니라 주장해야 할 권리로 보는 것인데, 이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사적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작의 주장보다 나아간 것이다. 사회생활과 모성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변화되어야 하며, 여성은 이를 요구하며 싸워야 한다. 상민은 모권을 쟁취한다. 하지만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역시 한계를 지닌다.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는 남자들(옛 애인과 김감독)과 달리, 그녀는 자본주의 안에서의 성공을 꿈꾼다. 그녀는 휴머니즘이 자본주의에 포획되는 과정을 인지하면서도, ‘휴머니즘을 이용한 자본주의적 성공’을 꾀한다. 영화 역시 ‘사랑’이 아닌 ‘경쟁’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 그녀의 자기합리화를 추인한다. 그러나 남성은 체제를 거부할 수 있어도, 여성은 일단 체제 안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는 논리는 새로운 강박이다. 자본주의적 성공이 그녀(들)을 자유케 하리라는 복음은 믿기 어렵다. “기업에 돈을 많이 벌어주는” 슈퍼커리어우먼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자본주의적 요구에 맞춰 자신을 ‘개조’하는데 열중하는 여전사들 중 과연 몇 명이 카드 빚과 우울증과 거식증을 피해 자유를 얻을 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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