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도 : 소비문화

김성윤 / 사회학과 공간연구팀 ‘아작 스페이스’

그동안 적지 않은 논자들이 인간의 사회문화적 경험에 언어가 차지하는 구조적 제약에 착목해 왔다.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 언어체계를 딛고 일어섰다. 인간의 경험을 조건화하는 기호체계가 언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실제로 우리는 언어가 아닌 영상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울하게도, 시각성이 인간의 사유는 물론이고 신체와 의지까지도 초월하는 광경을 목도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쟁점이 제기된다. 언어적 경험이 특정한 문법에 따라 진행되는 게임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반면 대개의 시각문화 논의들은 시각적 경험 속에 그 문법을 넘어서는 실천적 지류가 있음을 전제한다. 예컨대 우리는 언어 속에서 종종 근대적 표상체계의 흔적을 찾아내지만, 시각문화 논의들은 비근대-전근대-근대-후기근대-탈근대는 물론이고 초근대-반근대-역근대를 아우르는 일견 역동적이고 실천적으로 보이는 맥락을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시각문화는 매혹적인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시각문화가 사회적 개인들에게 이렇듯 활력 넘치는 길을 제시해주는가 하는 점에 있다. 시각문화와 관련한 쟁점을 낱낱이 다루기에는 지면이 좁으니, 첨부한 사진들과 함께 이 ‘매혹의 간지’를 에둘러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인지와 파악’, 시각적 경험의 역설


해질 무렵 청계천변에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안락을 즐기고 있다(사진1). 그런데 그 풍경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행복해 보이면서 어딘가 우울하다. 목가적이면서 동시에 도시적이다.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이 바로 시각문화의 도입부이다. 사람들은 도시의 편린적인 경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청계천에 발을 담그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시야가 청계천에 머무르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렌즈의 시선을 따라 보다 높은 곳에 올라 고개를 들고 시야를 확보해보자.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시공간을 인지하지만 파악하지 못하는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고도자본주의의 문화논리로 우뚝 선 조형물이 하나의 시선을 내뿜으며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행복감과 우울함이 공존하는 이 역설적 풍경화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그 자체로 ‘구경거리’ 사회이자 ‘감시’의 사회임을 읽어낼 수 있다. ‘인지’와 ‘파악’의 이러한 역설은 시각문화가 내포하는 하나의 텍스트성이다.
나아가 이 체계 속에서 무엇이 ‘가시화’되고 또 무엇이 ‘비가시화’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다. 가령 우리는 청계천을 비롯한 도시의 여러 기념비들을 인지하는 와중에(가시화), 그리고 달동네가 사라짐으로써 도시의 경관이 정비됨과 동시에(가시화), 반지하·쪽방·노숙·임대아파트 등으로 은폐·재집중된 빈곤이 보편적인 시각화 체계로부터 배제되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비가시화).

정체모를 행복감과 우울함


또 하나의 사진을 보자. 청계천변의 공구상가는 50억원에 이르는 정부의 보조로 간판을 ‘천편일률적으로’ 새 단장했지만(좌측의 가시적 영역), 한갓진 골목의 상점들은 바로 이웃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예의 키치적인 포스를 간직한 채 도태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우측의 비가시적 영역). 이것은 정치 그 자체이다. 시각적 경험의 조직은 선택과 배제의 체계를 따라서 우리의 사유체계를 통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 가시적으로 주어진 인공물들이며,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비가시적으로 배제된 삶의 리얼리티이다.
이렇듯 ‘우연히’ 하나의 프레임 안에 들어온 이 시각성은 시각예술이 함의하는 공식적인 관람환경을 넘어 대중들의 일생생활 영역을 두루 포괄하며, 대중들의 개인적인 자연적 시각 체계와 초개인적인 정서의 교통 그리고 집합적인 표상 체계 전반을 횡단한다. 따라서 우리의 시각적 경험은 단순히 시각성에 매몰되지 않고 언어적이고 담론적인 것들과 만나게 된다.
다시 처음에 제기했던 쟁점으로 돌아가자. 시각문화는 대중들에게 역능의 기회를 실현시켜주는가. 시각성은 근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 모델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것이 주체의 손상과 마멸을 통해 매혹의 자기실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그 장을 통해 대중들의 부단한 헤게모니적 과정을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은 정체모를 행복감이 아니라 언제어디서나 씻을 수 없는 우울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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