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s - 여성

이정연 / 철학과 석사과정

여성 학자, 여성 CEO, 여성 국무총리 등이 거론될 때면 여성의 지위가 발전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과거에 비해 여성 권리가 더욱 보장되고, 사회적 지위도 급격히 향상되었다는 것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공’이라 부를 수 있는 여성의 현재 지위가 오히려 여성에게 불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 여성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모순된 지위에 놓여진다. 여자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가지만 그들은 항상 사회적으로 남성이 정의내린 여성의 지위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여성의 지위에 대해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실 이는 여성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이런 여성상은 여성 스스로가 형성한 것이라기 보다는 지배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누구인가.’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한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질문은 여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모색하도록 이끈다. 바로 여성이라는 성 주체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고대 사회에서 소녀들은 소년들이 받는 교육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소녀들은 장차 주부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맞는 교육만 받았다. 그녀들을 위한 교육공간은 기녀 양성학교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기녀니 요부니 하는 자신들에 대한 규정에 격렬하게 맞서려 하였고, 그러기위해 의식적으로 금욕적이거나, 나아가 ‘동정녀’ 로서의 인생을 선택했다. 르네상스기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신분이나 체면 유지에 필요한 교양의 영역에 한정되었고, 그나마도 미혼인 경우에만 가능했다. 인문주의적 훈련을 받았던 여성들은 결혼하는 순간 공부도 끝이었다. 결혼한 여성이나 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학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서구의 근대 초기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자유·평등·박애’를 모토로 내건 프랑스 혁명은 당시에 인권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남성만을 위한 투쟁이 되어버렸다. 여성들은 여전히 재산이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했다. 18세기 계몽주의가 한창인 유럽의 어디에도 여성의 평등권은 관찰될 수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시대에도 ‘여성들은 생각할 능력이 있는가, 여성은 영혼이라는 것을 갖고 있는갗 라는 질문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을 ‘대립’의 개념 대신 ‘차이’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페미니즘 담론의 등장은 이제껏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사유의 결여나 부정태 정도로만 간주되어 왔던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성적인 차이를 부각하고, 나아가 더 이상 위계질서를 세우는 일을 중시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와 그 바탕에 깔린 가부장적인 가치와 규범들에 대한 비판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노력도 현재까지 여성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 살아왔다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계속 탐구해야 하는 것은 이미 구축해 온 사고와 사상으로는 여성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없었기에 여성들은 모순된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여성에 대한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여성의 성공이 오히려 계속되어야 할 ‘여성’에 대한 물음을 성급하게 종결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과 남성적 사회의 기준에 의한 ‘성공’의 자리가 진정으로 여성의 성공이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기억해야한다. 왜냐하면 여성에 대한 성찰 없이 성공과 발전을 묻는다는 것은 여성들을 제자리에 머물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고와 삶을 모르고서 어떻게 여성 자체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여성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기엔 이미 늦었다. 인간에게 자기 성찰의 역사가 계속되기 위해 여성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온전한 사회로 서기 위해 여성은 이미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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