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의 夢타주


문화연구학과 석사 2차 김현승

 ‘함민복’시인은 그의 시『광고의 나라』에서 이미‘행복과 희망이 가득 찬, 절망이 꽃피는’이 ‘광고의 나라’에 대해 역설했다. 일명 ‘지름 神’을 자주 강림케 하는 광고의 나라, 현대사회 속의 현대인들에 대해, ‘나는 산다(購買), 고로 나는 산다(存在).’라는 또 다른 명제로 그 상품 물신의 세태를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그러하기에, 21세기,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펼쳐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가.
 현대성의 상징인 ‘도시-텍스트’들을 재료로 하여 벤야민이 계획했던 것, 몽타주 재료들이기도 한<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서술양식이 현대적이다. 몽타주는 총체성의 재현이 불가능한 시대에 그 총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부분들의 성좌구조로 재현하려는 노력이다. ‘진정한 진보’를 얘기한 벤야민은 이 저서에서 19세기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현대를 고대와 현대, 신화와 역사의 변증법적 이미지로 재현한다. 그 시대는 가속화된 자본주의적 진보의 폭풍이 유럽 대륙에 오히려 전체주의적 먹구름을 몰고 오던 위기의 시대였다. 그런데 19세기 근원사를 제대로 읽어내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19세기의 자본주의적 꿈의 도시를 거닐고 있는 대중이다. 그럼으로써 19세기는‘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펼쳐지고 있는 현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근원사가 오히려 현재의 실천을 담보할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부르주아들은 새로운 건축 소재를 이용하여 기능적 건물을 짓는 대신 인간의 태곳적 꿈을 표현한 건물들, 특히 탐욕적인 상가 파사주를 지었다. 여기서 수집가이자 역사가 벤야민은 자본주의적 꿈의 잔해들에서 ‘상품 물신’이 표현된 ‘환등상’들만 읽어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생산력 발전에 투사한 소망의 이미지, 즉 유토피아적 이미지를 함께 읽어낸다. 결국 19세기에 대한 비판인 파사주 프로젝트의 목적은 이 표상들을 이것들이 갖는, “사회적 산물의 미숙함과 사회적 생산 질서의 결합을 …… 미화”시키는 보상의 기능에서 풀어내어 역사적‘깨어남(각성)’을 통하여 어떤 정화된, 혁명적인 이용의 대상으로 변용시키는 데 있다.
 오늘날 인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이나 환경 파괴 등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험하였지만, 고통과 결핍으로 가득한 일상 때문에 인류가 시뮬라시옹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매트릭스 속에 칩거하는 한 인류의‘미혹과 천국의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 파리의 아케이드는 현대성의 판타스마고리아가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매혹의 장소이며, 또한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 혹은 횡단해야 하는 공간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도시의 바깥, 현대성의 바깥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도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오직 도시의‘경험’만이 우리를 도시의 환상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강조했던 유토피아적 희망의 실현을 위해, 21세기를 실제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부풀기만 하는 물신화된 욕망을 어떤 혁명적 실천의 에너지로, 어떻게 전환시켜야 할까. 지금 이 세계 위엶꿈과 희망이 가득한 곳, 환상의 세계로 오세요.’라는 언어들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벤야민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시선과 성찰들이 현대의‘파사주’로 매개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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