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문학의 바탕을 일군 파한집<破閑集>


‘고전面하기’는 한문의 어려움을 벗어내고 우리 선조들의 정신문화를 대면하자는 의미에서 우리 고전이 가지는 현대적 가치를 생각해 본다. <편집자주>

이상보 / 파한집 역자

고려 명종 때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파한집>은 3권(상·중·하) 1책의 수필집이다. 이 <파한집>은 그의 아들 세황(世黃)의 손으로 원종 1년(1260)에 초간본이 간행되고, 효종 10년(1659)에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는데 지금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그 뒤로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활자본으로 펴내고, 1964년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小庸齋叢話)>와 합본으로 역주해서 간행했다. 또 1973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에서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 2권을 영인본으로 펴내면서 <파한집>도 그 속에 넣었다. 그 내용은 모두 83편의 소품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로 시에 얽힌 이야기가 41편이나 되므로 흔히 시화집 곧 평론집으로도 본다. 그리고 또 신라와 고려의 풍속이며 서경과 개성의 풍물에 이르기까지 당시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42편이나 되기에 패관문학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형식으로 말하자면 수필 영역에 넣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파한집>은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고전수필집으로서 그 뒤를 이은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과 최자의 <보한집(補閑集)>,

한국문학의 뿌리를 찾아야
이제현의 <역옹패성(木樂翁稗說)> 등과 조선조에 이르러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동인시화(東人詩話)>, 허균의 <성수시화(惺詩話)>, 홍만종의 <시화총림(詩話叢林)>과 <순오지(旬五志)> 등 수 많은 책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문집으로 <은대집(銀臺集)> 20권과 <후집> 4권, <쌍명재집> 3권과 <파한집> 3권을 지었으나 지금 전하는 것은 <파한집> 뿐이다. 다만 그의 시문이 서거정이 엮은 <동문선>에 일부가 실려 전해 오니 곧 율문(시)이 84수요, 산문이 15편이다. 여기에 <파한집>에서 오세재에 관한 이야기 한 편을 옮겨보면 이런 것이 있다.
“세상 일 중에 빈부나 귀천으로 높낮이를 정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무릇 완성된 문장은 해와 달이 하늘을 곱게 하고 구름과 연기가 하늘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이면 보지 않을 수 없고, 덮어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칡베옷을 입은 비천한 선비로도 넉넉히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을 드리울 수 있으며, 조맹(趙孟, 진나라의 귀족)의 귀함이야 그 세도가 나라를 부하게 하고, 집안을 넉넉하게 하는 데 모자람이 있으랴만 문장에 있어서는 칭찬할 수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문장은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부로써도 그 가치를 경감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양영숙(歐陽永叔)은 ‘후세에 정말 공정하지 못하다면 지금까지도 성현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복양 오세재(吳世才)는 재주가 있는 선비지만 여러 번 과거에 들지 못했다. 갑자기 눈병을 앓아 시를 지으니 ‘늙음과 질병이 서로 따르니 / 마지막 나이의 가난한 선비로다. / 현화(玄華)는 밝음을 가리는 게 많고 / 자석(紫石)은 비치는 게 적도다. / 등 앞에서 글자 보기 겁을 내고 / 눈 온 뒤에 달무리 보기 부끄럽도다. / 금방(金榜)이 끝남을 기다려보다가 / 눈을 감고 앉아 기회를 잊는도다.’고 했다. 세 번이나 장가들었으나 바로 버렸으므로 자식이나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이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도 이어갈 수 없었다. 나이 50에야 과거에 한 번 들었으나 동도(東都)에서 객지생활을 하다가 죽었는데, 그의 문장에 있어서까지 어찌 곤궁하게 쓰러졌다고 버릴 수야 있겠는가?”(파한집 하 22)라고 글벗을 두고 그의 인물과 문장에 대한 느낌을 간결하게 적어놓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당시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을 날카롭게 비평하고 있으며, 중국 시인들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추종할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문풍을 진작시켜야 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한국문학의 뿌리를 이들 고전수필에서 찾아내어 그 빛나는 전통사상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흔히 플라톤이 어떻고, 공자가 무어라 말하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어떤 것이라고 끌어다 쓸 것이 아니라 <파한집>이나 이황의 문집인 <퇴계집> 등 우리 조상들의 기록물들 중에서 옛일을 이끌어내어 오늘 우리의 문학과 일상생활의 지침으로 삼도록 우리 고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문으로 적어놓은 옛글들을 쉬운 우리 한글로 옮기는 일에 힘써야 한다.
끝으로 2000년 11월 15일에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에서“선비가 선비를 대우하지 않으면 누가 하랴?”는 깃발 아량쌍명재 이인로선생 문학비’를 세우기로 발의하고, 온 나라의 선비(교수와 문인)들 90여명이 성금을 모아 우쾌제 박사(인천대 교수)가 비문을 짓고, 농산 정충락이 붓글씨를 써서 빗돌에 새겨 01년 4월 5일에 연고지인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 2동 원인재 곁 공원터에 세움으로써 그의 문학정신을 기린 바가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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