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기억


대학시절 만화에 맛을 들인 적이 있었다. 방학이나 학기 시작되는 어중간한 틈새를 이용해 닥치는 대로 빌려다 보곤 했었다. 일주일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만화를 보다가 잠깐씩 먹고, 자는 생활을 즐겼다. 다 커서 만화의 재미를 느낀 탓일까. 수많은 작품 중 가장  감동 받은 만화를 꼽는다면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이것은 다방면으로 많은 생각을 주는 작품이다. 첨단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미래사회의 불안감과 혼란성, 기계와 생명에 대한 모호한 경계, 육체와 영혼를 가진 인간에 대한 정의. 그 중에서도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기억’이라는 것에 끌렸다.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가 의체인 쿠사나기 소령. 자신의 기억 또한 누군가가 만들어 낸 모의인격은 아닐까 의심하며 자신은 사람인가 기계인가를 고민한다. 또한 기억을 해킹 당해서 몸만 살아있는 인간, 고스트가 없는 인형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는 바로 기억이라고 오시이 감독은 말하고 있다.
문득 오늘의 나를 만든 기억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하루 종일 시골길을 따라 바람을 따라 들로 산으로 쏘다니던 시절. 비 오는 날에는 처마 밑에서 빗물 받아먹고 토란잎에 물방울 장난치던 기억. 어릴 적 기르던 염소에게 받힌 그 끝자리를 생각하는 지금의 나. 정말 나를 만들고 있는 기억은 거창한 사건과 기록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상의 내면 풍경이리라.
고향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회색빛의 도시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억을 가진 덕분이다. 즉 점점 심화되는 소외현상과 자기기만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우리 스스로 처방할 수 있는 것은 추억을 되새김질 하며 끊임없이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 아닐까


이호석 편집위원 / hoseak76@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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