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피가 흐르는 순간


 

이준희 /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오래전 내게 ‘개와 늑대의 시간’에 대해 말해준 이가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또한 연락할 방법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해버렸으니까. 말 그대로 ‘증발’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녀의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녀의 행방을 몰랐고, 단지 ‘우리들’에게 이럴 줄은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여하튼 그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그날만큼은 또박또박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어스름히 어둠이 찾아올 무렵을 말하는 거래. 왜 그런 때 있잖아, 낮이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지는 그 사이의 순간. 그 시간에 옆 마을로 놀러갔던 개들이 돌아오는데, 그 개들 사이에 늑대가 숨어들어온다는 거야. 그래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대. 그때의 하늘은 어둡고 세상은 아주 짙은 파란빛의 기운이 감돌지. 사물의 경계가 흐릿해져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 직감했어야 했다. 어느 저녁 그녀가 그 파란빛을 따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직감은커녕 그녀가 말한 그 파란빛이 감도는 시간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나 또한 분명히 그 시간을 경험했으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추상적인 경험을 직접 말로 풀어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 엇갈림이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그 ‘시간’을 경험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치 무거운 돌 하나를 들고 깊은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날도 그런 상태로 도서관에 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녁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평소처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나는 온몸이 굳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이 온통 짙은 파란색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그녀가 이야기한 그 ‘개와 늑대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더니 내 입을 통해 그녀에 대한 이야기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 순간은 마치 덫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동안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흘러나오는 단어와 문장들을 꿰어 맞추거나 종이에 옮겨 적는 일밖에는 없었다. 그래야만 몸과 마음이 여느 때처럼 돌아가 그나마 평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파란 빛이 세상을 감싸는 순간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발작적으로 펜을 꺼내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툭 던진 말과 그 빛은 치명적인 독이 되어 여태 내 혈관 속을 흐르고 있다. 몸 속 어딘가 숨어있던 파란 피가 흐를 때면 나는 또다시 펜을 꺼내 무턱대고 적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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