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없는 폄훼, 된장녀  


소비문화가 또 하나의 신조어를 낳았다. 이른바 ‘된장녀’가 바로 그것인데 그 유래를 두고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주제 넘는 과소비 행태를 비아냥거리는 말임에는 분명하다. 2천원짜리 라면을 먹고 기꺼이 6천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거나 학교식당을 이용해 아낀 돈으로 네일아트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젠장(된장)’인 것이다. 문제는 그 대상이 ‘여성’이라는 데 있다. 그 대척지점에 있는 ‘고추장남’의 경우를 보면 ‘곧 취직할 남자’로 아직 취직하지 못한 백수 상태의 남자를 뜻한다. 과소비의 행태가 비단 여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텐데 왜 이런 비난이 소득 계층을 넘어 남녀 성대결의 양상으로 비춰지는 것인지 웃기는 노릇이다.
사실 여성들의 삶의 방식이, 그것이 소비 행태이든 의식의 문제이든 비난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20세기 초 신학문의 등장과 함께 자유연애사상을 들여온 신여성들에 대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가부장제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비난이 그러했고, 식민지배와 전쟁 중에 미군에게 몸을 파는 기지촌 여성을 보며 외세에 영합한다는 비난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미 FTA 협상으로 국민들의 불안이 고조된 시기에 여성들의 소비행태를 문제 삼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사실 이런 불만을 넘어서서 어떤 여성을 된장녀로 낙인찍었을 때 얻게 되는 장점은 더 이상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이 있다면 된장녀로 욕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된장녀 열풍이 단순히 사치와 허영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라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런 사치와 허영을 뒷받침해 줄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열등의식이 적개심을 넘어 여성을 가상의 적으로 만들고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하필이면 외국바람이 들어간 여성이 거대 외국자본의 흐름과 맞물려 눈에 들어왔을 때,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고 다잡음으로써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다르다. 20세기의 신여성이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에 아무런 저항 없이 불행한 삶을 살아 왔다면, 21세기의 여성은 ‘난 소중하니까’라는 말로 코웃음을 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 욕망을 떳떳이 추구해 나간다. 이제 더 이상 ‘된장녀’라는 이유없는 폄훼로 여성들을 도마 위에 올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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