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과 정치학에서 ‘주체’와 ‘보편성’의 개념은 중요한 문제의 장을 구성해왔다. 우리는 이 개념들을 논쟁의 장으로 새롭게 불러들이려 한다. 첫 기획에서는 버틀러 정치학의 급진적 함의와 그 성과를 읽어내고자 하며, 다음 호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다.<편집자주>

주디스 버틀러 : 비정체성의 젠더정치학

조현순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연예인 하리수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영화 <다세포 소녀>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적금을 붓는 미니스커트의 꽃미남(?) 두눈박이나,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동료에게 성폭력당하고 처녀성을 상실하는 남장 여성 브랜든은 어떨까. 여자로 태어난 뒤 남성적 이차성징이 발현되어 동료 여교사와 성관계까지 맺은, 19세기 프랑스의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뱅은 또 어떠한가.
96년 6월 MTF 트랜스 여성을 성폭행한 피고인들에 대해 대법원은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죄’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반면 02년 하리수씨의 성별정정이 허가된 후, 03년에는 서울 및 지방가정법원에서는 22명이 성별정정 허가를 받았고, 04년에는 22건의 성별호적정정 신청 중 10건이 허가 되었으며, 05년에는 26건의 신청 중 15건이 허가됐다. 최근 대법원은 출생이후 한결같이 생물학적 성에는 불일치감, 반대 성에는 귀속감을 느끼면서 신체적, 사회적 영역에서 전환된 성역할을 수행한다면 전환된 성을 법률적 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성적 본질주의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
현재의 이 상황에서 페미니즘의 정치적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일반적 ‘범주’로서의 여성없는 페미니즘은 가능한가.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을 시작하면서 맨 먼저 제기하는 질문이 바로 페미니즘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집단적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가이다. 이 ‘범주’로서의 여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가부장적 이성애주의 비판에다가, 실천 지향의 페미니즘의 역사가 보인 정체성의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체성의 정치학’은 버틀러가 정치적 행위의 실천 주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범주’로서의 여성을 비판할 때 그 중심에 있다.
본질주의와 대립하는 현대의 구성주의 페미니즘은 ‘본질적인’ 여성의 정체성이라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 ‘여성’ 아닌 ‘여성들’로서 인종, 계급, 나이, 민족, 섹슈얼리티라는 다양한 구성요소로 채워진 어떤 ‘범주’를 ‘미리’ 가정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본다. 정체성의 본질적인 불완전성을 가정하면 ‘여성들’은 오히려 강압적 이상에서 벗어난 규범적 이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범주의 통일성은 효과적인 정치적 행동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통일성이라는 목표에 대한 성급한 고집이 등급간의 더 심한 파편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체성이나 주체의 문제는, ‘정치성’과 ‘재현’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특히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우선 정치성은 권력의 이중적 기능, 즉 사법적 기능과 생산적 기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권력이 정당함과 부당함을 이분화하고 부당함을 처벌하고 훈육한다는 의미의 사법적 기능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권력이 어떤 개념의 인식가능성 자체를 통제해서 인식가능한 주체를 생산하고 인식가능하지 않은 주체는 비체화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학의 사법적 주체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배타적 실천을 통해서 생산된다. 담론의 구성물을 근본적 전제로 조작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로 ‘여성’이라는 재현대상은 ‘여성들’이라는 복수형태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묘사하거나 재현하려는 바에 완전히 동의해야 하는 안정된 기표가 아니라 문제의 용어, 경합의 장소, 불안의 원인이다. 이미 젠더화된 사람은 다른 역사적인 문맥에서도 그 젠더가 언제나 일관되거나 지속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젠더는 담론적으로 구성된 정체성의 인종, 계급, 민족, 성, 지역적 양상과 교차되므로 이미 정치나 문화의 교차점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개념이다.
요약하면, 버틀러에게 ‘범주’로서의 여성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경계대상이다. 여성의 ‘해방’조차도 누구를 위한 어떤 해방인지가 역사적으로 맥락화되지 않으면 또 다른 폭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의 기초를 여성들이라는 관념에 묶어두는 배타적 관행은 재현에 대한 자기주장을 하는 페미니즘과 같은 맥락에 있지만, 중요한 것은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를 생산하고 그 생산 작용을 은폐하는 정치작용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 계보학의 과제이다.
이와 같은 비-정체성의 정치학, 페미니즘 계보학을 위해 버틀러는 세 가지 논제에 역점을 둔다. 우선 첫째는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허무는 것이고, 둘째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론을 전도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이 모든 생산권력의 기저에 있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밝히는 것이다.
우선 섹스와 젠더는 다른 것이 아니다. 버틀러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주장한 보봐르조차 태어나는/만들어진 여성주체, 몸/정신을 이분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거기에는 한 젠더나 다른 젠더를 걸치거나 전유할 수 있는 코기토가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리가레에게 여성은 남근로고스중심주의 안의 ‘재현불가능성’이며, ‘하나’의 성이 아니라 ‘다수’의 성이다. 이 ‘하나이지 않은 성’은 패권적인 서구 재현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주체라는 개념 자체를 조직하는 본질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지점을 마련한다. 결국 보봐르에게 여성은 남성 주체의 ‘타자’이거나 ‘결핍’이지만, 이리가레에게 여성은 재현의 조건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예 남성언어 안에서는 표현될 수 없다. 보봐르의 주장대로 ‘몸이 하나의 상황’이라면 문화적 의미가 각인되지 않은 몸, 즉 ‘언제나 이미’ 문화적 의미로 해석되는 몸에 기대지 않는 것은 없다. 따라서 섹스는 전-담론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으며, 그 정의상 섹스는 지금껏 내내 젠더였음이 드러난다. 젠더는 그 총체성, 통일성, 일관성이 영원히 연기되고 불완전하게 남아있는 일종의 복합성이다. 이는 ‘완결’이라는 규범적 목적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수렴과 분기를 허용하는 열린 조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도된 인과론이다. 여성이 담론적 실천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라면, 젠더 정체성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가해진 규율권력이자 지배담론일 것이다. 위띠그와 푸코는 이성애적 헤게모니의 파열과 전치를 통해서 성의 범주가 일소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띠그는 특히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레즈비언만이 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유일한 개념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여전히 레즈비언이라는 또 다른 주체를 세운다는 한계를 갖고는 있으나 여성이라는 일반 범주에 파격을 가하는 선언이다. 또 푸코는 본질적인 성의 문법은 각 용어에 인위적인 일관성을 부여하여 두 성간에 인위적인 이분법 관계를 강요하며, 특히 섹슈얼리티의 이분법적 규제는 이성애적, 재생산적, 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수성을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갈등의 장으로서 ‘젠더’와 구성된 보편성
결국 이 단단하고 결정적인 토대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성차’나 ‘여성’범주는 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복된 규제적 이상의 각인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조작된 것이며, 그 기저에는 이성애자만이 주체(subject)이고, 동성애자는 비체(abject)라고 선언하는 가부장적 이성애 중심주의가 있다. 페미니즘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정치학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섹스안에 들어 있는 문화적, 제도적 규제를 인식해야 하고, 특정 섹슈얼리티를 비체의 기준으로 삼는 규율권력의 지식생산체계에 대해서도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젠더는 이미 명사가 아니다. 젠더의 표현물 뒤에는 그 어떤 젠더 정체성도 없으며, 정체성은 그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 표현물로 인해 수행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험적이거나 일반적인 ‘집합’이나 ‘범주’로서의 여성은 없다. 여성은 언제나 재의미화와 재각인에 열린 경합의 장소이며, 그 열린 의미화의 가능성이 급진적 정치성을 가능하게 하는 초석인 것이다.
그러나 보편범주로서의 ‘여성’이 없다고 정치적 실천주체가 없는 것이 아니며, ‘본질적’ 의미의 보편성이 없다고 의미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성은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우연적 토대위에서 잠정적 일시성으로 소환되고, 또 다시 흩어진다.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 특수성이 경합하는 ‘구성된 보편성’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 전환적 여성주체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계기로서의 체현(embodiment)은 정황적이고 파편적인 우연적 토대위의 보편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보편성을 무대화(staging the universal)’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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