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 /  이상용

<아무도 모른다>는 네 명의 아이들이 처한 일상의 장면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먹고, 자고, 걷고, 화단에 물을 주고, 장난감 피아노를 치고, 옷을 갈아입는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엄마, 엄마의 옛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소년, 편의점에서 물건 훔치기 등. 버려진 아이들의 삶을 위협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쉬지 않고 일어난다. 일상에서 소재를 취하는 대중영화는 남녀간의 만남, 가족사이의 불화, 이별과 같이 범속한 것들을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의미를 지닌 사건들을 범속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돌려놓는다. 돌아오지 않은 엄마에 대한 분노도, 아이의 죽음도 감정을 수직으로 상승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한 편의 영화인가 아니면 하나의 삶인가. <아무도 모른다>는 허구와 삶의 경계 속에 자신의 영역을 확보한다. 이를 위해 감독의 개입은 최소한 된다. 그것은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윤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15년 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삼고 있고, 일본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에서 자식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부모가 언론에 나와 사죄하는 사례를 든다. 일본은 유달리 가족과 연대적 책임의식을 사회적으로 묻는 경우가 많다. 고진은 좀 더 나아가 윤리가 여러 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안에서는 자살 테러가 고결한 도덕적 행위지만, 반대쪽에서 보면 전혀 부도덕한 행위일 뿐이다. 고진은 어떤 집단 안에서 통용되는 규범을 ‘도덕’이라 부르고, 세계 시민에 통용될 수 있는 규범을 ‘윤리’라고 부른다.


일본 비평가의 관점을 <아무도 모른다>에 되돌려 주자면, 관객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도덕적인 사례를 넘어서서 ‘윤리’란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비극적인 상황은 부조리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눈물을 흘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 15년이 지난 후 지금까지도 벌어지는 세계내의 모순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속에 들어 있는 모순들을 천천히 되새기며, 다른 차원으로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사람들의 무심함을 선포하는 제목이 아니라 사람들의 끝없는 관심과 애정을 요구하는 서명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