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간은 살면서 수많은 인연을 맺는다.
그런 인간의 삶을 영화 속 스크린은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가.
이번 특집호 테마가 ‘충돌’인 만큼 삶의 영역속에서
충돌의 모습과 그것이 던져주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특별히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김지운 감독, 박찬욱 감독
그리고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통해 그들이 바라보는 충돌은 무엇인지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 보고자한다.
단순한 문화매체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을 반영해주는 거울로서의 영화가,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감독들이 바라본 충돌은
과연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편집자주>






 

작가로서의 욕망과 상품으로서의 가치




“파리 뒷골목을 지나다보면 이름 없는 초라한 의상실 쇼윈도에 예술 같은 디스플레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설치돼 있어요. 어딘가에 그런 예술을 해놓고 서명도 없이 시치미 뚝 떼고 있는 고수가 있는 거죠” <달콤한 인생>의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이 말을 꼼꼼히 더듬어보자. 저 파리 뒷골목의 디스플레이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위해 설치되었다. 우리는 그래서 저것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솜씨가 여느 예술가보다 빼어날지라도 디스플레이어는 자기 작품에 서명을 할 수가 없다. 파리 뒷골목은 갤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디스플레이어로서 감독의 욕망




영화감독은 이러한 디스플레이어를 닮았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갤러리보다는 백화점과 더욱 유사한 공간이다. 영화관은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대규모의 군중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감각기관을 자극해 그들이 지갑을 열도록 종용하는 장소다. 그래서 영화감독도 결국은 디스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영화감독들은 디스플레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서명을 적어 넣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신의 임무를 잊고 오로지 서명하는데 몰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홍상수는 자기 서명을 분명하게 영화 속에 새겨 넣는 감독이고, 김기덕은 자신의 서명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연출가다.


서두에서 인용한 김지운의 진술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그 역시 서명에 대한 욕망을 은밀하게 노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디스플레이어지만 이렇게 빼어난 솜씨를 가졌으면 서명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서명을 해야 예술가 명부에 오를 것 아닌가. 김지운은 자신과 같은 행인들을 매료시키는 디스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동시에, 자신의 작품에 서명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눈치 챌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서는 디스플레이어로서의 임무과 서명에 대한 욕망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이러한 충돌이 본격화된 것은 <장화, 홍련>에서부터다. <장화, 홍련>은 사실 대중들을 매혹시키기 위해 연출된 영화다. 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시청각적인 장치들을 총동원해 관객들을 놀라게 하기도하며 공포에 빠트리기도한다. 디스플레이어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자의식을 이 세계에 농도 짙게 용해시켰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국적을 알 수 없는 을씨년스러운 공간이 마치 유기체처럼 구축되어 관객들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또한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리저리 비틀려 있어 관객들을 함정에 빠트리고 비평가들을 교란시킨다. 쉽게 해명이 되지 않는 내러티브는 대중들을 단숨에 유혹해야하는 디스플레이어로서는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 있음에도 김지운은 끝내 이러한 앞뒤가 엇갈린 이야기구조를 고집한다. 이 모두가 일종의 서명의 제스처다.


이러한 충돌은 <달콤한 인생>에서 조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김지운은 임무와 욕망, 즉 디스플레이와 서명 사이의 조화를 꾀한다.
어쩌면 이처럼 충돌을 조화로 바꾸어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인지도 모른다. 그는 필름 느와르와 홍콩 느와르의 나르시시즘을 동시에 차용해 세련된 감성을 자아내고, 시각적으로 더욱 찬란하고 인공적인 공간을 구축하여 대중들을 그 세계 안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오직 자신의 영화적인 경험을 반추하며 관객들에게 보다 영화적인 자극을 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는 영화광으로서의 자의식을 노출시키며 형식적으로 자신의 영화가 여느 단순한 디스플레이와는 다름을 증명하려 한다. 즉 자신의 작품이 디스플레이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은 디스플레이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속 충돌




종종 김지운과 같은 부류의 연출가로 분류되는 류승완의 경우도 이와 매우 유사하다. 그가 연출한 <주먹이 운다> 역시 앞서 언급한 충돌로 인해 매우 모호한 위치를 점하게 된 작품이다. 류승완은 여기서 다분히 신파적인 감성을 과감하게 수용한다. 그는 감동적인 광경을 만들어내고 관객들의 눈물을 짜내려고 작정한 듯하다.


그렇지만 그는 영화를 공식대로 해피엔딩으로 이끌지 않는다. 두 주인공에게 영화의 러닝타임을 정확히 반씩 배분한 뒤에 영화가 결말에 이를 때까지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두 주인공을 싸우게 한다. 영화는 결국 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패배로 아쉽게 끝날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류승완은 이처럼 매듭 끝을 비틀어 이 디스플레이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 핸드 헬드와 클로즈업의 과감한 사용을 통해 서명은 더욱 진하게 새겨진다.   또한 김지운과 류승완의 배후에는 박찬욱의 존재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충돌이 가장 극명하고도 아이러니하게 이루어진 것은 박찬욱의 영화들에서다. 게다가 박찬욱은 그러한 충돌을 통해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두 감독은 무의식중에 그를 모델로 삼아 작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박찬욱 세대’ 영화의 가장 분명한 속성은 장사꾼으로서의 임무와 작가로서의 욕망 사이의 충돌이다.


그런데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러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누벨 이마주’ 양식을 표방한, ‘필름 느와르’ 풍의 엉성한 ‘신파극’을 연출한 바 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서명도 적어 넣고 어설프게 흥행도 겨냥하니 영화가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다음 작품 <삼인조>는 박찬욱 자신이 좋아하는 B급 영화의 감성을 고의로 표방하면서도 상업적으로 최소한 안타라도 쳐야한다는 중압감을 벗어버리지 못한 작품이다. B급 영화의 감성은 그가 작가로서 서명을 하는 수단이었지만 그는 제대로 서명도 못하고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끌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서명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실한 디스플레이어가 된 순간 서명의 기회를 얻게 됐다.(<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이제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피할 수 없는 자기 내부의 ‘충돌’을 역으로 이용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올드보이>가 그 결실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말도 안 되는 자신만의 화법을 서슴없이 구사하면서도 관객과 효율적으로 소통하는데 성공한다.  


지금 우리는 서명하고 싶은 욕망과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아야하는 임무가 한국영화계의 중심에서 충돌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역설적으로 한국 영화의 가장 유망한 대안이 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영화 붐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말초적인 자극에 만족하던 행인들은 이제 내심 서명하는 감독을 원하게 되었고, 서명을 명예롭게 여기는 감독들도 시장의 생리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영화제도 10주년을 맞고, 세계최초의 영화주간지<씨네21>이 창간된 지도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영화는 이러한 충돌을 통해 다시 한번 도약하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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