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삶의 어려움이 상상으로 떠민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지금 인터넷에는 키워드만 입력하면 정보는 넘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누군가가 상상력을 구현해 놓은 것이기에 자기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은 아날로그 책에서 스스로 상상력을 찾기 시작했다. 올해 출판계가 보여준 가장 큰 특징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개인의 자기 상상력 추구’로 볼 수 있다.  
개인은 누구인가. 1990년대 한국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생산물’이 아닌가. 1989년에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우리 출판계는 1980년대의 ‘역사성’이라는 담론을 일거에 포기하고 ‘개인주의’를 추구했다. 디지털 문명의 도래, IMF라는 국가적 위기, 문민 3대정부의 탄생 등은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제 개인은 가정과 직장과 사회라는 갑옷을 모두 날려버리고 허허벌판에 홀로 서서 자기 생존을 철학을 찾아야 한다. 그 누구든 ‘메이저리그의 승자’가 되지 못하면 단지 생존을 위해서 세상을 떠도는 ‘유목민(nomad)’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로또 광풍’에 휩쓸려보기도 하고 ‘10억 만들기’에 나서보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가장 큰 경쟁력은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개인들이 자기 상상력을 추구했다는 증거는 소설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올해 종합 1-2위는  <다 빈치 코드>(댄 브라운, 베텔스만)와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가 다퉜다. 이 소설들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상상력이다.<다 빈치 코드>같은 팩션faction형 소설은 인간의 상상력을 ‘강제’하며 <연금술사>는 인간의 희망(꿈)을 향한 기나긴 상상의 여정을 담고 있다. 팩션이란 역사(사실)적 상상력인 팩트fact와 허구적 상상력인 픽션fiction이 하나로 융합된 것을 말한다. 팩션으로는 <다 빈치 코드>외에도 <천사와 악마>(댄 브라운, 베텔스만), <단테클럽>(매튜 펄, 황금가지), <진주 귀고리 소녀>(트레이시 슈발리에, 강), <4의 규칙>(이안 콜드웰 외, 랜덤하우스중앙) 등이 인기를 끌었다.  
100만부를 돌파한 <다 빈치 코드>에는 역사적 실재인물이 등장한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루브르 박물관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너무나 정확한 묘사에 혀를 내두른다.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서둘러 루브르 박물관에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팩트는 세밀하게 묘사된다. 어김없이 살인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적 기법이라는 당의정 또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는 소설에 제시되는 지식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인류가 생산해 놓은 모든 지식을 동원해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지식이란 단서가 강요하는 것은 물론 상상이다. 마치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인터넷에 들어가 키워드를 누른 다음 그 키워드에 제시된 수많은 정보를 ‘읽어가며’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이겨낼 화두를 상상하는 것과 닮았다. 이런 소설 읽기는 검색이라는 습관과 유사하다. 키워드가 ‘단서’가 되어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수없이 제시되는 정보(지식)를 활용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모든’ 지식을 통합해 ‘단서’를 해결한다.
이제 개인은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 ‘밥’과 ‘상상’의 리더십을 찾아야 한다. 상상력이란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가 아닌가. 인문시장에서는 인문적 실용서가 유행했는데 이는 학문마저도 현실적 상상력과 결합돼야만, 엄정해야할 역사마저도 주관화할 때 더욱 의미가 발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원래 ‘20세기적인 가치관’은 정상이나 중심을 향해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상이나 중심이 사라졌다. 그것은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보편적인 가치관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대 ‘표현’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별 착오 없이 전해지는 것이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관은 사라졌다. 그래서 동기부여의 혼란상태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런 혼란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개인’은 과거에 여자가 주변적인 존재였을 때 쌓아온 지혜, 즉 대화, 설득, 협상, 유혹 등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의 지혜를 활용하려 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좋아질 줄 모른다. 아니 더욱 암울해져가고 있다. 그런  세상은 개인에게 더 강해지라고 요구한다. 위약한 마음의 개인은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격투기에 열광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지녔던 ‘신발’과 ‘갑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힘에 자신을 던지는 것으로 그런 요구에 대응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인간세계와 물질세계를 하나로 보았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하면서 그것을 나누기 시작했고 인간세계가 아닌 것은 무시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최고조로 발달한 하이테크 사회를 유토피아로 보았지만 눈부시게 기술이 발달하고 눈만 뜨면 새로운 상품과 마주쳐야 하는 지금, 그런 꿈은 한낱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1999년에 이미 대중은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와 쾌락을 동시에 맛보았다. 그런 다음 인간과 물질, 이승과 저승, 영혼과 육체 등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연결지음으로써 그 동안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웠던 감수성의 문을 한껏 열어 제치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곳에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것을 발견해나가려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은 언제나 현실과 결합되어만 빛을 발한다. 팩트와 픽션이 결합되는 것이 바로 그 이치라 할 것이다. 의사동물인 다마고치를 진짜동물처럼 여겼던 것이나 애완동물을 가족 이상으로 여기는 것은 ‘대상’이라는 팩트를 확보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흐름을 반증한다. 미디어가 무수히 쏟아놓는 쾌락과 불안, 정보과잉이 던져놓는 정보부재 혹은 정보소외의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티커 사진이나 컬링 반지 같은 팩트를 눈으로 확인해야만 사랑이라는 실체를 비로소 확인하는 것처럼 현실과 환상을 하나로 결합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내년에는 아마도 개인이나 사회나 올해 추구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아젠다’를 만들어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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