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프로이트▶ 상상은 무의식적 욕망이야
융▶ 그건 눈에 안보이는걸 보이게하는 거야 확대해석해 봐
바슐라르▶ 상상력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꿈꾸라구


 


상상에 대하여



박기현 / 중앙대 강사


서구 사상사에서 상상계(想像界, imaginaire)에 대한 인식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 이후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많게든 적게든 한번씩은 상상력(imagination)과 이미지(image)에 대해 언급을 하였고, 그때마다 상상력은 때로는 인식의 과정을 돕는 긍정적 가치로, 때로는 인식을 방해하는 방해물로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루어진 합리주의의 승리와 더불어 상상력의 사회적 기능이 약해지면서, 상상력은 인간 이성의 판단을 막아버리는, 즉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방해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통사회에서는 상상력이 의식(儀式)이나 주문(呪文)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 속으로 끼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서구 합리주의의 발달은 인간을 이러한 무형의 재산으로부터 분리 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계적인 실용주의의 강요를 통해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해 왔다. 인간의 상징적 기반의 퇴보는 산업 사회의 발달에 크게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추상화된 작업 양식과 사회적 소외는 작업에 있어서의 몽상의 기회를 박탈하고 상상력에 있어서 빈혈에 걸린 인류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구의 인식론의 역사는 이미지와 상상력에 대한 억압의 역사라고 다소 과장되게 표현할 수 있다. 이미지와 상상력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론적 깊은 탐구는 20세기에 이루어졌다.
20세기에 일어난 이미지와 상상력에 대한 인식론적 작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선, 프로이드(S. Freud), 융(C.G. Jung) 등의 정신분석학자, 카시러(E. Cassirer)같은 신칸트주의 철학자,  리쾨르(P. Ricoeur) 같은 해석학자, 그리고 그 외에 엘리아데(M. Eliade), 코르벵(H. Corbin), 바슐라르(G. Bachelard) 등의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대로 상상력은 인식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인간 인식 활동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원초적이며 인간의 개념적 사유의 바탕에는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바슐라르를 통해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와의 은밀한 합일을 가능케 하는 기능을 가지며 인간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두번째로는 바슐라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상상력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화를 통해 새로운 인류학을 정립하겠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질베르 뒤랑(G. Durand, 1921-)이 밝혀낸 대로, 상상력의 활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무한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상력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화의 작업은 가능하다. 셋째로는 뒤랑의 업적이 밝혀낸 가장 중요한 사실들 중의 하나로서 합리성과 상상력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다원적인 인간의 상상계는 각각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합리성 자체도 복수(複數)화되며 이른바 서구의 합리주의는 이러한 다양한 합리성 중의 한 부분으로 포섭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의 활동이라는 것도 보다 폭넓고 일반적인 상상계의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활동이 된다. 당연히 뒤따르게 되는 것으로서 인간 상상력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는 결국 인간학 자체를 이미지 중심주의, 상상력 중심주의로 이끌게 되고 상상력에 입각한 인류학은 다원성을 바탕으로 다른 것에서 차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보고 또한 그 차이 너머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공통 토대를 보는 인류학, 또한 그 차이의 역동적 관계를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인류학, 새로운 인식론을 낳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질베르 뒤랑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를 밝히고자 하는 야심으로 문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종교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인문과학을 한데 아우르는 큰 틀로서의 상상력 연구를 계획했다. 그의 이런 시도의 결과로 나온 상상계 연구소 네트웍은 현재 프랑스 상상력 연구의 주된 축을 담당하고 있다. 1966년에 그르노블에 최초의 상상력 연구소가 세워진 이후에, 그곳에서 활동하던 학자들의 제 2세대들을 주축으로 하여 프랑스 전국에 16개의 상상력 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한국을 비롯한 10여 개 국가의 20여 개의 상상력 연구소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인식론은 서구의 유일한 진리에 대한 믿음 자체를 상대화시킬 수 있게 해준다. 결국 합리주의에 입각한 서구의 인식론은 서구의 상상계가 낳은 그들의 인식론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합리성은 그들과 다른 인식을 비합리적이라고 배척할 만큼 배타적이었지만, 그들의 합리성을 그들만의 합리성으로 제한할 수 있을 때 그들과 다른 인식은 비합리적인 인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합리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양의 상상계를 서구적 편견에서 바라보는 태도도 경계해야 하지만 동양의 불교적 사유, 도가적 사유를 동양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로 보는 편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우리가 인류라는 유기체 내에서 그 유기체와 관련성을 맺으면서 함께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될 수 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