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회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의 만남

 


안정옥 /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상임연구원


오늘날 시간에 관한 연구는 자연과학,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학제간 접근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지구 온난화, 생태위기와 위험사회의 도래는 근대적 시간의 화살이 꿰뚫어 정복할 수 없는 자연의 리듬이 있으며 자연의 리듬을 왜 존중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정보화와 세계화에 따른 시공간 압축과 신축화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범주로서 시간의 위상과 아울러 시간체계 변화의 위력을 드러내며 사회적 시간 체계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


사회학이 다루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시간, 즉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구성된 시간이다. 사회학은 시간의 사회적 구성론의 입장을 취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뒤르켐이 시간을 초험적 범주로 보는 칸트의 접근 방식을 거부하면서 뚜렷해진다. 뒤르켐의 시간연구 전통은 오늘날 마페졸리(M.Maffesoil)같은 사회학자에게도 이어지는데 집합적 의례나 기억을 통하여 집합적 리듬을 재생산하는 신성한 시간, 즉 사회적 유대의 시간에 주목하는 데 특징이 있다. 


사회적 시간에 관한 사회학적 접근의 공통점은 이처럼 사회적 시간의 조직과 사회적 관계의 조직을 결합하는 데 있지만 그렇다고 뒤르켐적 전통으로 모두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가 사회적 시간의 조직과 사회적 유대의 신성한 시간에 주목한다면, 맑스는 시간의 자본주의적 조직을 둘러싼 사회적 적대를 강조하며, 베버는 표준화된 시간체계로서 근대적 시간체계가 어떻게 행위의 합리적 조직양식이자 지배양식인가를 드러낸다. 짐멜 또한 사회적 소통의 양식으로 합리적 시간 체계에 관심을 기울인 바 있다.

 

사회적 관계속의 시간체계 변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는 모두 시간 측정과 시계 시간에 기반을 둔 동기화를 엘리아스(N.Elias)의 지적처럼 특정한 목적을 가진 인간활동, 즉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확립하고 조직하는 능력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점은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의 구별을 넘어선다. 뒤르켐의 연구가 전근대에만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세사가 자끄 르고프의 연구는 교회 첨탐 위의 시계시간이 개인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에 관한 기대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정하는 체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미 대륙에서 철도시간의 복잡한 조정은 표준시가 없으면 불가능했고 이러한 조정 체계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경영과학과 경영혁명의 전사를 이루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륙적 수준에서 국민적 통합을 달성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오늘날 인터넷 실시간 상호작용의 발달로 시간 단위를 1천분의 1초로 쪼개자는 제안도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관계의 조직, 조정 양식에 대한 특정한 기대를 투사하고 있다.


물론 시간을 사회적 관계론의 관점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시간, 원장면(primary scene)을 향한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시간, 반복과 차이로서 니체의 영겁회귀와 의식의 흐름으로서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 등은 근대적 시간의 직선성, 즉 선형성에 대한 관념을 넘어설 때 드러날 수 있는 사회적 시간의 다양한 측면에 관한 탁월한 기여들이다. 그것은 사회적 시간에 대한 근대적 관념이 진보로 이해되는 근대의 역사적 시간 개념에 대한 파악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보의 관념은 조금 더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천년왕국적인 기원과 종말의 시간관, 즉 타락과 원죄, 예수의 현현, 죽음, 부활과 구원 - 역사의 정지로서 천국/유토피아(열반) - 이라는 기독교적(유럽어족적) 시간관과도 결부된다는 점에서 문화론적이고 문명론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의 만남을 확인하는 것은 따라서 오늘날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근대의 시간체계는 시간을 직선으로 펼쳐서 그 마디마디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진보로 보았고, 사회적 관계를 이러한 틀에 맞추어 재조직하였다. 사회적 관계는 시간을 주어진 희소자원으로 간주하고 단위 시간당 산출과 효용을 최대화하려는 시간의 경제에 종속된다. 시간의 경제의 으뜸 문제는 노동(시간)을 어떻게 조직하고 통제하느냐였다. 근대적 시간의 발전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여가 개념이 지배하고 종교적 축일이 많은 중세적 시간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간 경제의 헤게모니와 일상에서 노동의 중심성 획득을 의미했다. 근대 초엽 영국의 진보적인 수평파(Levellers)나 평등파(Diggers)가 모두 노동을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 부상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신교와 노동의 중심성이라는 관념을 공유하는데 다만 노동의 중심성을 노동자의 중심성과 연결하는 데에서 갈라졌을 뿐이다. 후자의 길이 근대의 ‘노동사회’적 진보주의로 이어졌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현재 성찰적 재구성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 또한 이러한 길이다.


 오늘날 어떤 길을 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미 답변이 주어져 있다고 가정한다면 기원과 종말을 가정하는 근대적 시간관 - 또는 인과론 -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고도로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구체적 조사와 분석 없는 답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구들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어떻게 조사하고 분석할 것인가에 대하여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경험과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이 과거에 유용했던 길을 쉬 버리는 것과는 다르며, 새로운 문제제기를 인정하는 것이 그것을 검증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으로 이는 노동의 중심성과 노동의 중요성을 구별하여 전자에 사회생활과 관계의 다른 측면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노동의 사회적 조직 양식이 다양한 사회주체의 사회적 관계와 생활양식에 갖는 효과와 함의를 시야에서 놓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시공간의 압축과 신축화에 따라 노동 양식의 변화가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져가고 있는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접근 방식일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양식의 변화에서 실제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노동의 선험적 중심성을 계속 전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노동시간, 가족형태와 젠더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부부의 노동-가족 관계의 형태가 생활양식과 사회적 소통의 형태를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 사회적 시간 체계의 재구성과 역사적 시간성이 다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그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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