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고대적 시간의식에서 근대적 시간의식으로

 

 

송승환 / 시인

 

순환적 시간은 예전부터 유목민의 경험을 지배해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랑의 매순간마다 반복되는 상황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지역적으로 장소에 고착되어 있기에 각기 구별되는 장소들을 각색함으로써 공간에 내용을 부여한다. 유목민의 비슷한 장소로의 일시적 귀환은 동일한 장소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순수한 회귀, 즉 일련의 동작이 반복된다. 떠도는 유목생활로부터 정착된 농경생활로의 전환은 내용없는 게으른 자유의 종말이자, 노동의 시작을 뜻한다고 기 드보르(Guy debord)는 <스펙타클의 사회>(현실문화연구, 1996)에서 말한 바 있다. 농경적 생산양식은 일반적으로 계절의 리듬에 종속되기 때문에, 완벽하게 구성된 순환적 시간의 토대가 된다. 영원은 순환적 시간에 내재해 있다. 왜냐하면 순환적 시간이 지구상의 바로 여기, 이 동일한 장소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생명의 변이를 근거하는 순환적 시간

 

순환적 시간의식의 대표적인 상징은 바로 달(Lunar)이다. 달은 재생과 회귀, 죽음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달은 생명의 리듬을 가진 천체의 가장 완벽한 예이다. 태양의 리듬이 하루하루를 나누고 우주 시간의 기준이 되고 있다면, 달의 리듬은 구체적인 시간, 즉 땅 위에서의 생명의 변이의 시간에 대한 기준이 된다.

 

시간은 천체의 움직임과 낮과 밤의 교차를 통해서 고대인에게 인식된다. 밤은 시간의 첫 번째 실체이다. 인도에서는 시간을 ‘어둠의 나이(Kali-Yuga)’라고 부른다고 한다. 밤의 천체인 달은 완전한 죽음-그믐-을 겪는 천체이다. 그 때문에 달은 시간과 죽음에 연결된다. 달의 주기적인 변화는 고대인들에게 시간을 잴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새해 첫날인 설날, 그리고 우수·정월 대보름부터 섣달 대한·보름, 그리고 그믐까지 차고 이우는 달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대지의 생명은 그 주기에 따라 생성과 성장, 소멸의 주기를 가진다. 따라서 고대인들의 달의 숭배는 대지의 풍요를 가져왔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이러한 순환적 시간의식을 직선적 시간의식으로 철학적으로 전환시킨 사람은 중세시대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이다. 그의 역사에 대한 핵심 이념은 여전히 성서의 묵시적인 어떤 것, 즉 지상의 에덴, 타락으로 인하여 죽음이 인간에게 이르렀다는 사실, 구속(救贖), 천년왕국, 낙원에 복귀함으로써 끝나는 최후의 심판과 구원받은 자의 불사(不死)와 같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온 생이 죽음을 향한 경주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순환론적인 시간의식의 자리에 직선적인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이는 기독교가 풍미하던 중세를 지나면서 가장 유력한 역사관이 되었다. 중세 기독교 사회는 시간을 유한한 과정, 연속적이고 회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역사 이전과 역사 이후로 나누는 시간의 분기점에는 이러한 시간의 분리가 있다.

 

근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것과 똑같은 강력한 방법으로 주기적인 시간을 거부한다. 중세는 이성과 계시의 대립을 거쳐 과학과 합리성, 주체의 형성과 신의 죽음으로 그 자리를 근대에게 넘겨주었다. 기독교 사회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시작된 근대의 미래는 휴식처도 종말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근대의 미래는 지속적인 시작, 앞으로만 전진하는 영원한 움직임이다. 끊임없이 전진하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언제나 전진하는 진행, 이것이 근대의 미래이다. 근대의 미래지향성 속에는 이성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불안과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기만 하다.

 

그 불안은 근대에서 시간이 노동시간의 화폐화 형태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시간은 초단위로 분절되고 사회적 노동시간은 전사회적으로 관리되어 우리는 상시적인 생산 경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리는 매순간 시간에 쫓겨 살며 시간 앞에서 긴장하며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귓전을 때리는 초침소리에 계속해서 전율과 충격을 받게 됐다.

 

볼프강 쉬벨부시(Wolfgang Schivelbusch)의 <철도 여행의 역사>(궁리출판사, 1999)는 기차를 통해 근대의 시간의식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차는 시간의 파편화와 공간의 압축, 상품 생산의 폭증과 시장의 확대를 존재 조건으로 삼았던 산업 혁명 시기의 산물로서 산업 혁명의 영웅적 경적을 울리며 서로 고립된 지역과 공동체를 통합했다. 그 ‘빠름’으로 인간의 시간 공간을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인간과 하나였던 시간 공간개념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순간의 시학 속에 놓인 현대인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시간의식은 다른 공간을 하나로 묶어서 직선적으로 진행시키는 시간의식이다. 직선적 시간의식의 특징은 파편적이며 매번 스스로를 부정하는 새로운 현재는 항상 ‘순간’적이다. 시간을 ‘이전’과 ‘지금’으로 매순간 나누는 칼날 같은 부정이다. ‘찰나’와도 같은 이 순간의식은 일반적으로 재생과 회귀라는 신화적 세계관 내에서 영원히 순환되는 주기성을 지닌 ‘고대적 시간의식’과는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현대의 시간의식인 것이다.

 

옥타비오 빠스(Octavio Paz)는 <흙의 자식들>(솔, 1999)에서 모더니티란 거부이고 바로 조금 전의 과거에 대한 비판이며 지속성에 대한 방해라고 주장한다. 이 방해는 다름아닌 모더니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차별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우리는 매순간 죽고 매순간 태어나는 순간의 시학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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